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현찰 시리즈 == === 동전 === 북한 동전은 건국 초기 당시, 천리마 운동을 업고 산업 활성화가 막 진행되려던 1959년에 기존 소액전 지폐(15전, 20전, 50전)를 대신하는 '''3종 구성(1전, 5전, 10전)'''으로 시작하였다. 세 동전 모두 앞면에 국장, 뒷면에 액면을 넣은 간소한 모양으로 찍어내었다. 그러다 1978~1979년 재정비를 위한 신권 발행 당시 50전 지폐를 대신할 50전 동전이 추가되어 4종 구성'''(1전, 5전, 10전, 50전)'''이 되었다. 다만 이 50전 동전은 다른 세 동전과 달리 국장과 액면을 앞면에 몰아넣고, 50년대부터 진행된 천리마 운동의 성과를 과시하려는듯 천리마 동상의 모습을 뒷면에 큼지막히 찍어내었다. 이후 1987년에 인민대학습당을 넣은 '''1원''' 동전을 추가하여 5종 구성이 되었다. 2002년에는 명목상으로 유지하고 있던 환율(2.14원/USD)이 폐지되면서 북한 원화의 가치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른 신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고액권 지폐(5천원까지)가 발행되면서, 원래 교체 목적으로 찍어두었던 '''10전([[진달래]])/50전([[김정일화]])/1원([[김일성화]])''' 주화 신권의 발행이 2009년(제 5차 화폐개혁) 이후로 미뤄졌다. 기존 천리마 50전 주화와 비슷한 사양으로 하되 뒷면은 모두 꽃을 한 송이씩 담아내었다. 다만 ''채고조넘''의 이름이 들어간 50전과 1원에는 각각 '''불멸의 꽃'''이라는 수식어를 추가로 덧붙였다(...) 2008년에 '''1전([[철쭉]])과 5전([[목란]])'''도 마찬가지로 꽃으로 바꾸어 찍었으며, 이 또한 2009년 개혁 이후에 처음 배포되었다. 그 사이 2005년에, 그 북한의 신 경제정책이 효과가 거꾸로 들었는지 대미 북한 원화 시장 환율이 끊임없이 올라가 김일성이 들어간 돈<ref>백원, 천원, 오천원</ref>이 아니면 쓸데가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고, 때문에 푼돈의 기준도 달라져서 '''5원/10원/50원/100원''' 네 종류의 지폐를 대신할 동전을 급하게 발행하였다. 기존 전화 동전들처럼 국장과 액면만 덩그러니 찍힌 단순한 모양의 값싼 [[알루미늄]]화이다. 허나 이 당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북한 원화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기어가고 있던 탓에 제대로 유통되지는 못했으며, 2009년 개혁과 함께 유통 중단 조치되었다. 하지만 조치된 사항과는 별개로 실제 유통은 암암리에 이루어졌고, 2020년대에 들어선 되려 고액권인 500원화 및 1000원화가 동일한 패턴으로 추가 발행되었다. === 김정일 후반/ 김정은 시대 : 5차 발행 (2009 ~ ) === 2009년 11월 30일에 도입되어 동년도 12월 6일에 대체가 완료(?)된 현행권. 교환 비율은 1/100 ~ 1/1000 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자금회수를 목적으로 한 탓에 너무 혁명적(?)으로 진행되어서 전 세계에 북한의 막장행보를 광고하는 꼴이 되었다. 조금 상세하게 쓰면 처음 교환시 세대당 '''구권 10만원'''의 제한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예금'''해야 했었으나 이미 주민들이 4차 개혁(1992년)때 보기좋게 당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ref>하물며 그때는 '민족의 태양'이라 불리는 김일성이 살아있었을 때였다.</ref> 갖은 수를 써서라도 예금만은 피하려 했었다. 당국도 이런 현상을 재빨리 파악하곤 1인당 5만원 추가교환을 허가하였다. 이 정도면 잉여재산이 거의 없는 일반 가정에선 그래도 별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으나<ref>4인가족 기준 30만원까지 교환이 가능한 것인데 당시 가구당 잉여재산이 대략 이 수준이었다. 이 값은 당시 시장환율로 환산하면 대략 '''미국 50달러 정도'''였다.</ref> 평소에 예금을 불신하던 일반 상인계층에겐 여전히 어림 반푼 없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북한 당국은 강제로 구권유통을 금지시켰고, 장마당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모조리 폐쇄시키는 바람에 열심히 모은 재산이 모두 휴지가 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 수많은 장마당 상인계층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결론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몰론 인간존엄이고 사회도덕이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에 먹을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게 문제. 근본적으로 국영시장에 풀린 식량만으로는 도저히 모든 인민들을 먹여살릴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마당 시장이 활성화 된 것인데<ref>당연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가격이 훨씬 싼 국영시장에 물건이 들어왔다면 그게 1순위다.</ref> 강제로 장마당을 몰락시켰으니 말 그대로 진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당국에선 부랴부랴 김대장하사금도 뿌리고 임금도 100배나 인상하여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였지만]] 그래도 민심이 사그라들지 않자 결국 1~2달만에 로동당이 직접 사과를 하고 통제를 푸는 등의 패배선언(실패선언)을 하고 만다. {| class="wikitable" ! colspan="3" | Choseon 5th Series (2009) |-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DAD9FF; width:33%;" | 5원 <small><s>인민공돌이의 과거와 미래</s></small> 과학자와 대학생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C5E47E; width:33%;" | 10원 [[조선인민군]] 3군 <small>(공/해/육)</small>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E8D9FF; width:33%;" | 50원 [[인민]] 3대 로동계층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1.jpg]][[파일:2002-5won-2.jpg]]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2.jpg]][[파일:2002-10won-2.jpg]]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3.jpg]][[파일:2002-50won-2.jpg]] |- | style="text-align: center;" | 수력발전소 | style="text-align: center;" | [[한국전쟁|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공식명칭) | style="text-align: center;" | [[조선로동당]] 창건기념탑 |-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C5E47E;" | 100원 [[목련]]화 (목단)<ref>북한의 국화이다.</ref>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E8D9FF;" | 200원 [[천리마]]상 (평양)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DAD9FF;" | 500원 [[개선문]] (평양)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4.jpg]][[파일:100 вон КНДР.jpg]]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5.jpg]][[파일:Nkorea08-200b.jpg]]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6.jpg]][[파일:500 вон КНДР-р.jpg]] |- |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 | (뒷면 도안없음) |-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E8D9FF;" | 1,000원 [[김정숙]] 생가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D9E5FF;" | 2,000원 [[백두산]] 비궁 ([[김정일]] 생가)<ref>라고 홍보하는 곳. 사실 저곳은 백두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놓은 곳이고 실제 김정일은 러시아 출신이라 보는 시각이 절대적이다.</ref>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FFD9EC;" | 5,000원<sup>(구권)</sup> [[김일성]]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7.jpg]][[파일:Nkorea08-1000b.jpg]]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8.jpg]][[파일:2000 вон КНДР.jpg]]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09.jpg]][[파일:Nkorea08-5000b.jpg]] |- | style="text-align: center;" | [[삼지연]] | style="text-align: center;" | 백두산 [[천지]] | style="text-align: center;" | 만경대<sup>(구권)</sup> |-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B2EBF4;" | 50,000원<sup>(2022년 임시화폐)</sup> (돈표)" |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FFD9EC;" | 5,000원<sup>(2021년 임시화폐)</sup> (돈표) | style="text-align: center; background-color:#FAE0D4;" | 5,000원<sup>(신권)</sup> [[만경대]] |- | style="text-align: center;" | | style="text-align: center;"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510.jpg]][[파일:2013 - 5000won-2.jpg]] |- | style="text-align: center;" | | style="text-align: center;" | | style="text-align: center;" | [[국제친선관람관]]<sup>(신권)</sup> |} * 왜 돌연 5천원권에서 김일성 초상을 빼버렸는가에 대해 추측만이 나돌고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북한 원화의 가치하락으로 험하게 쓰여지면서, 덩달아 김일성 초상화가 찢기고 더렵혀진 채로 곳곳에 나뒹구는 꼴을 보기 불편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 시리즈에 각종 선전문구를 담은 도장이 찍힌 기념권이 존재하는데, 정말로 기념해서 발행했다기보다는, 중국발 수요를 맞추고자 불법유출 대신 수출시킨 통화로, 북한 국내에서 통용되지 않도록 식별의 목적으로 찍은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반 일련번호 권종에 찍힌 '견양'도장 또한 그런 의도라는 것. 워낙 대량으로 유출된 탓인지 이쪽은 거의 염가로 팔려나가고 있다. 그 문구들의 종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등장순) ** 견본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탄생 100돐 (1912-2012) / 전 권종 (구형 5000원권 포함) ** 조선로동당창건 70돐 기념 / 5000원권 **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 탄생 100돐기념 (1917-2017) / 5000원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70돐 (1948-2018) / 50, 200, 500, 1000, 2000원권 ** 조중외교관계설정 70돐 (1949-2019, 中朝建交70周年) / 5000원권 *** 후술할 3차 및 4차 발행권과는 달리 5차 발행권은 위 기념문구를 박아넣은 <s>가짜 아닌 가짜</s> 지폐 말고는 씨가 말랐나 싶을 정도로 유통화=통용권<ref>대놓고 외화벌이로 팔아먹기 위한 것이 아닌, 실제 북한 주민들에게 공급하려는 목적의 지폐.</ref>을 구하기가 어려운 편인데, 이는 그동안 북한 돈이 외부로 유출되는데 있어 북한 내부 고위층과 중국계 홍콩 셀러들이 맞장구치는 공이 컸기 때문이다. 나름 그럭저럭 호형호제를 외치긴 하던 2000년대까지와는 달리 2010년대의 북중관계는 어딘가 떫떠름한 관계가 지속되어 홍콩 셀러들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고, 특히 북한쪽에서 유통화 유출을 철저하게 관리하게 된 까닭에, 유입단계부터 말라 비틀어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는 2021년에 발행된 돈표가, 2년이 지난 2023년에도 구경조차 힘든 것으로 간접증명을 하고 있다. * 2021년 9월 경에 태환권과 '''유사한 형태'''의 5천원권<ref>같은 시기 환율로 약 미화 1달러(US$1.00)에 해당한다.</ref>을 찍어낸 것이 밝혀졌다. 다만 기존에 있던 '외화'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단순히 "'''돈표'''"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대외무역환경이 매우 열악해지자 상대적으로 쓸모가 줄어든 외화들의 값이 반값으로 주저앉았고, 이 틈을 타 주민들의 외화보유량을 늘리게 될 것을 정부측이 우려한 것인지, 외적으론 외화가치의 안정을 국가가 보증하는 수단, 내적으로는 달러를 국고로 긁어오려는 목적으로 다시 찍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한편으로 동년도 10월 경부터는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로 인해 은행용지 수입에 차질을 빚자, 북한 국내산 용지를 사용하는 돈표 그 자체를 화폐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2003년 이전 사담 후세인 정권 말기의 [[이라크 디나르]]의 행보와 같다. 그러나 그 '돈표'마저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이듬해 4월 6일 전후로 신 고액권인 5만원권(!)을 내놓았다. {{폐기권}} === 김정일 시대 : 4차 발행 (1992~2009) === 김일성의 말년기인 1992년에 시행된 화폐개혁의 골자는,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말년기인 2009년에 시행된 화폐개혁과 판박이로 닮았었다. '''작정하고 재정회수를 위해 자행한 화폐개혁은 이때가 시초'''이다. 당시 구권과의 교환비는 '''1:1'''로 고시하였으나, 실제 교환 시 1인당 399원까지<ref>약 4개월분 월급 상당</ref>만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전량 은행으로 강제 저금시켰다. <s>그리고 주민들은 그 돈을 다시는 구경할 수 없었다.</s> 또한 공교롭게도 김일성과 김정일, 둘 다 화폐개혁 시행 후 2년 뒤에 사망한<ref>김일성은 1994년, 김정일은 2011년에 사망.</ref> 공통점이 있다. 북한 이외 지역에서는 오히려 현행권(5차)보다도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리즈인데, 이 때는 북한이 겉으로나마 남측과 화해모드를 열었기도 하거니와, 외화벌이 목적 추정으로 북한에서 홍콩 셀러를 통한 통화 유출이 대규모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2002년에 시행된 새로운 외환법의 영향으로 기존의 태환권이 사라지고, '조선돈(내화)'의 통화량이 급격히 팽창한 것도 유출량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이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의 북한은 점점 소련(동유럽)의 지원이 줄어드는 와중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정책과 부패하는 사회 시스템과도 싸워야 했다. 거기에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남한이 [[1988 서울 올림픽|주류 세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나타나자 김일성은 속으로라도 성과에 안달을 내기 시작하였고, 그 눈치를 보는 지배 계층은 과대 포장된 성과로 달래었으며, 수뇌부는 다시 그 과대 포장된 성과로 이어지는 무리한 계획을 짜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살벌한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어진 지배 계층은 정직하게 살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기에 횡령으로 연명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당연히 그 부작용은 생산계층으로 떠넘겨져 불안정한 배급과 공급으로 인해 생산 동력을 잃어버렸으며, 그 결과는 경제적 파국이었다. 1994년 7월 정치적 지주인 김일성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김정일이 수장이 되었는데<ref>김일성 사후 3년 간은 유훈통치(기존에 남긴 '김일성 교시'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라 하여 원쑤 자리는 명분상 공석이었으나, 실질적으론 김정일 업적 승계 기간으로 활용되었다.</ref>,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북한 정치판에서 활동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공포정치([[선군정치]])를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995년부터 3년 정도 대규모의 홍수와 가뭄이 들어 농업 전반을 망가트렸는데, 애당초 소련의 붕괴 때문에 압도적인 화력에 눈이 돌아간 정황상 경공업 투자에 소홀했던 환경까지 겹쳐, 나라 전체가 극심한 식량 부족 상태에 빠지고 만다. [[고난의 행군|배급은 완벽히 중단]]되고 도리어 물자를 바쳐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로동자 월급조차 노동의 산물을 일부 받는 현물 지급으로 바뀌어 장마당(시장경제)가 강제로 활성화 되면서 북한 원의 가치는 철저한 시장원리로 결정되어, 이윽고 큰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이 시기 전후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단 한 번도 국가 배급을 받아본 기억을 갖고 있지 않는 세대를 '장마당 세대'라 하며, 이들은 겉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따르면서 속으로는 자본주의에 철저히 물들여진, 북한 수뇌부로서는 잠재적 폭탄으로 작용하게 된다. 사회주의경제가 작동하지 않자 기존의 100원권(1998년 기준 500원권)<ref>둘 다 각 시기별 로동자 1개월 월급 상당.</ref> 만으로는 화폐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때문에 남한과 기존 제1세계로부터 지원을 받아서라도 급한 불을 끄고자 하는 방향의 정책이 수립되어, 2002년 정초에 경제 정책도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급하게라도 고액권(1천원/5천원)이 인쇄되었고, '''외화 상점'''의 개념이 새로 들어섰으며, 구매권<ref>북한에서 공식 환율 적용으로 외화상점을 내화(조선돈)으로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권리증, 혹은 유가증권 그 자체를 가리킴.</ref> 제도도 이 때 도입되었다. {| class="wikitable" ! colspan="3" | 김정일 시대의 조선돈 |- | style="text-align: center; width:33.3%;" | 1원<br />영화 "[[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 ([[홍영희]]) | style="text-align: center; width:33.3%;" | 5원<br />학생과 [[지구본]]과 [[평양]]의 모습에 시민 | style="text-align: center; width:33.3%;" | 10원<br />로동자, 천리마동상, 공장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401.jpg]]<br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403.jpg]]<br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405.jpg]]<br /> |- | style="text-align: center;" | 금강산과 선녀 | style="text-align: center;" | 인민대학습당 (평양)<ref>대략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한다.</ref> | style="text-align: center;" | 서해갑문 |- ! colspan="3" | |- | style="text-align: center;" | 50원<br />3대 로동계층과 [[주체사상]]탑 | style="text-align: center;" | 200원<br />목련 (목단) | style="text-align: center;" | 500원<br />[[금수산태양궁전]]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407.jpg]]<br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411.jpg]]<br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413.jpg]]<br /> |- | style="text-align: center;" | 백두산의 풍경 | style="text-align: center;" | (도안없음) | style="text-align: center;" | 금릉 제 2 터널과 청류교 |- ! colspan="3" | |- | colspan="3" style="text-align: center;" | 100원/1,000원/5,000원 - [[김일성]]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409.jpg]]<br /> | style="text-align: center;" | <br /> | style="text-align: center;" | <br /> |- | style="text-align: center;" |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 만경대 (김일성 생가, 평양) |- ! colspan="3" | |} * 1992년 최초 발행때는 100원권이 최고액면이었다. 500원권은 1998년에, 1000원권과 5000원권은 2002년 7월 1일 신 경제정책 개혁으로 거래량이 늘어날 것을 감안하여 찍어낸 권종이며, 중간액면인 200원화는 2005년에 새로 추가되었다. * 1998년에 5원권과 10원권은 신판본(위 표의 사진)으로 나왔다. 그러나 급하게 찍은 것이 드러날 정도로 구판(1992년)에 비해 인쇄질이 떨어진다. 다만 북한 조폐국의 기술 자체가 빈말로도 썩 좋다고 못할 수준이다보니, 직접 비교해보지 않는 이상은 눈치채기가 어렵다. === 김일성 시대 : 2차/3차 발행 (1959~1992) === 1959년 2월 13일부터 동월 17일까지, 공식적인 '중앙은행'이 발행한 신권(2차)으로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직전 구권와 교환비는 1/100이다. 해당 권종은 완전히 내수용으로만 배포되었고, 조중무역이 활발하던 시기도 아니였어서 유출량 자체가 적은 탓에, 잔존수량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하물며 1차 권종(구권)은 북한 당국에서 아예 재판본(리프린트)을 찍어 판매한 전적까지 있으나, 이쪽은 건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960년대의 북한은, 비록 복구 작업이 필요하긴 하나, 일제가 남겨놓은 유산마냥 기본적인 공업 시설이 잘 갖춰진 상태에서 소련의 지원<ref>사실 미국과 직접 대치하는 지리적 사정과 1960년대부터 급격히 냉각된 중소관계의 반사효과 때문인 것에 가깝긴 하나, 결과적으로 중앙아시아 다음 수준의 지원력이 들어간 것은 맞다.</ref>까지 듬뿍 받은 덕택에, 대략 1985년 무렵까지 경제적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거기에 인민의 로동력을 전체주의로 버무린 사상으로 쥐어짜는 [[천리마 운동|혁명적인 정책]]까지 더해져, 북한의 경제성장 속도는 그 이름값처럼 빨랐다. 동시기의 남한은 기반산업시설이 전무하여 그야말로 극도로 빈곤한 농업국가에 불과하였고, 하물며 중국 접경지인 단둥 및 지린에서도 <s>모(毛)씨의 삽질과 더불어</s> 개발이 뒷순위로 크게 밀려있었던 탓에<ref>중국 동북지방, 특히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다른 소수민족 자치구들처럼 한족(漢族)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경제적 지원을 거의 않는 변두리(邊境地) 취급을 했었다. 또한 중국과 소련은 궁극적인 이념 자체는 비슷하였으나, 외교적으로 친분은 커녕, 서로가 뒤로 욕하는 악연 라이벌에 더 가까웠다.</ref> 극도의 빈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정말로 먹고 살기 위해 '''북한에게 손을 벌렸었던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훗날 북한이 조중 접경지역에서 아무리 막장 짓을 저지르더라도 중국 측이 쉽게 내치지를 못하는게, 과거에 북한으로부터 도움 받던 시절을 기억하는 계층이 아직 살아있어서 반발심을 우려하기 때문(=한화(漢化)가 덜 이루어졌다)이 아니겠냐는 견해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후 1979년 4월 7일부터 동월 12일까지 다시 신권(3차)으로 교체가 이뤄졌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아무 이유 없는 신권 발행'''이다. 다만 전반적으로 [[천리마 운동]]이나 [[혁명]]등이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어, 아마도 정권 홍보(+우상화) 및 사상 굳히기를 목적으로 바꾼게 아닐까, 정도로는 추측할 수 있다. [[김일성]]의 초상화<s>상판대기</s>가 이때 처음 등재되었다. 참고로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 북한 로동자 월급은 평균 100원 이내, 동시기의 남한 원화로 치환하면 약 5만원 정도이며, 남한의 일반적인 비숙련 노동자와 거의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 당시 북한에서의 '월급'은 사회주의경제 특성상의 배급과 별도로 지급되는 잉여재산 재분배에 가까운 개념이었던 반면, 남한에서의 '월급'은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의식주까지 해결해야 하는 근로성 댓가에 가까웠고, 심지어 당시 남한은 직군별 소득 격차가 매우 큰 편<ref>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간 소득 차이가 10배 이상은 기본으로 벌어져 있었다.</ref>에 복지 환경까지 극단적으로 갈린 편이었던 탓에, 소수의 부유층이나 실질적 기득권층<ref>하물며 이 때는 아직 민주화 운동이 달성되기 이전(제5공화국(전두환 정권))이다.</ref>을 제외한 대다수의 생활 쾌적도는 여전히 북한보다 한참 미치지 못하였었다. 하지만 이런 양상은 북한이 국가총소득 이상의 지출을 감행하고 있었던 탓도 있어, 1985년 전후부터는 서로의 상황이 급속도로 역전되어갔다. 1988년 경, 냉전이 끝나갈 무렵의 북한은 본의가 아니더라도 자립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깨닫고, 세계청년학생축전(1989년 개최)과 같은 국제 행사를 의욕적으로 계획하면서 본격적으로 외국인 및 외국 자본을 맞이할 준비<ref>이 부분이 기존 제 1세계와 다른 점이, 갖은 모든 사업을 국가(조선로동당)가 주도한다는 점에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이 자원 많은 북한에 비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f>를 하였다. 그 일환으로 외화태환권(※외화와 바꾼 돈표)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으며<ref>이전에는 기존 은행권(3차) 뒷면에 첨쇄 처리된 권종으로 지급하였다.</ref>, 실질적인 환전 업무의 개념도 이때에 처음 대두되었다. 미세조정이 가능한 계획고정환율제였고, 그 값은 (자본주의 돈표 기준으로) 2.18원/USD으로 책정하였다. 다만 이게 실제 시장물가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책정한 것이라 그 값이 거의 움직이지를 않았고, 격동의 1990년대를 보내면서 점점 실제 가치와의 괴리가 벌어지다보니, 2002년 7월에 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진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여행객들의 불평을 들어야만 했다. [[쿠바]]처럼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화폐로 바꾸어 받는 '돈표'와 자본주의 국가 화폐로 바꾸어 받는 '돈표'가 구분되어 있었고, 기타 특수 목적으로 제공하는 '돈표'도 따로 존재하였는데, 이는 각 돈표들을 구매하는 환율값이 달랐기 때문으로, 각 돈표들의 가치 자체는 모두 동일하다.<ref>즉, 북한 태환권 1원을 구매하는데 들어가는 중국 위안화와 미국 달러화의 가치가 동일하지 않았다.</ref> {| class="wikitable" ! colspan="5" | 김일성 시대의 조선돈 |-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 2차 발행분 (1959 ~ 1978) |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 3차 발행분 (1979 ~ 1992) |- | style="text-align: center;" | <br />[[금강산]]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206.JPG]]<br />[[흥남비료연합기업소]] | style="text-align: center;" | 100원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309.jpg]]<br /><sup><s>자칭</s></sup><small>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small> | style="text-align: center;" | <br />혁명의 요람 만경대 고향집<ref>양면의 문구 모두 실제로 쓰여있는 글귀이다. 아무리 지폐에 독재자가 자주 그려진다고 해도 대개 이름만 새겨넣고 끝이지, 이 정도의 미사여구를 붙여주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자기네들도 이상하다 느꼈는지 이후 발행분부터는 이러한 문구가 모두 빠졌다.</ref> |- | style="text-align: center;" | <br />쌀 수확하는 아줌마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205.jpg]]<br />[[대동강]] | style="text-align: center;" | 50원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307.jpg]]<br />"주체", 그리고 인민 4대 계층 (군인/농부/노동/정치) | style="text-align: center;" | <br />[[개마고원]] 호수 |- | style="text-align: center;" | <br />과일 수확하는 아줌마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204.JPG]]<br />[[대동문]] | style="text-align: center;" | 10원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305.jpg]]<br />천리마 동상 (평양) | style="text-align: center;" | <br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남포]]) |- | style="text-align: center;" | <br />(도안없음)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203.JPG]]<br />[[김일성종합대학]] | style="text-align: center;" | 5원 | style="text-align: center;" | <br />공업도시의 학생과 농가처녀 | style="text-align: center;" | <br />금강산 |- | style="text-align: center;" | <br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202.JPG]]고기잡이 배 | style="text-align: center;" | 1원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KPW301.jpg]]<br /><small>나팔부는 소년, 꽃 든 소녀, 정복 입은 청년, 후프 든 체조선수, 평양거리, "세상에부럼없어라" (선전문구) <s>확실히 [[부럼]]이 없긴 하지.</s></small> | style="text-align: center;" | <br /><small>혁명가극「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청년 &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 / 혁명가극「피바다」의 여성 & 평양거리</small> |- | style="text-align: center; width:24%;" | | style="text-align: center; width:24%;" | [[파일:nokwon201.JPG]] | style="text-align: center;" | 50전 | style="text-align: center; width:24%;" | (미발행) | style="text-align: center; width:24%;" | |} * 이때부터 한자표기가 완전히 사라진다. * 저액권과 고액권의 크기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인데, 특히 2차 발행분의 100원권은 거의 A5크기와 맞먹는 정도로 큼지막하다. === 건국 초기 (0/1차, 1947 ~ 1958) === 김일성 및 추존 세력(북조선로동당)에 의해 1948년 9월 9일에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한반도는 두 이념로 갈라선 채 실질적으로는 분단 상태였는데, 이는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이 외세에 의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당시 남측은 미군부가 관리하였었듯, 북측은 [[소련]]군부(일명, 붉은군대 사령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북측의 소련군은 조선은행을 장악하여 '계산실'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곤 임시화폐 성격의 지폐 4종(1, 5, 10, 100원)을 발행하였다. 뒤이어 1946년 1월 9일에 자본금 1억원(※조선 원화)으로 소련군부가 통제하는 중앙은행이 설립되었으나, 당시의 복잡한 정세상의 이유로 기존의 조선은행권을 취급하는 민간 기반의 농민은행도 같이 나타나, '붉은군대 사령부'의 화폐와 '조선은행권'이 동시에 통용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경제 이론에 따라 자본의 공공재화 과정의 일환으로 1947년 10월 29일부로 북측 정당이 꾸린 내각이 중앙은행의 전 권한을 이양받았고, 1947년 12월 6일에 본격적으로 중앙은행이 설치되면서 임시화폐와 조선은행권 양쪽을 모두 대체할 첫 공식 통화(1차)가 발행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남북분단이 확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으로서 개업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고 남북분단이 확실화 됨에 따라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1958~1959년 농민은행을 통합하는 안건이 포함된 통화개혁에 맞춰서 '북(北)' 부분을 떼어버리게 된다. {| class="wikitable" ! colspan="2" | 건국 초기의 조선돈 |- | style="text-align: center; width:50%;" | [[파일:nokwon100.jpg]] | style="text-align: center; width:50%;" | [[파일:nokwon101.jpg]] |- | style="text-align: center;" | 15전 / 20전 / 50전 공통앞면 | style="text-align: center;" | 15전 / 20전 / 50전 공통뒷면 |-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102.jpg]] | style="text-align: center;" | [[파일:nokwon103.jpg]] |- | style="text-align: center;" | 1원 / 5원 / 10원 / 100원 공통앞면 <s>[[워너 브라더스|원오 형제]]</s> | style="text-align: center;" | 1원 / 5원 / 10원 / 100원 공통뒷면 <s>선조주민</s> |} {{각주}} {{아시아의 화폐}} [[분류:화폐]] [[분류:북한의 경제]]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깨진 파일 링크가 포함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