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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도 [[태종]] 때에는 고려 시절 영향 때문에 백두산에 소사(小社)로 제사를 올렸다. 하지만 세종 19년([[1437년]])에 사전을 정비하면서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로 하면서, 백두산이 고려의 영토는 아니어도 고려의 천하에는 든다고 했지만, 조선은 좀 더 엄격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의 천하'''를 이야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영토가 아닌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릴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 시절에도 양성지는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제사를 올리자고 주장하였으나 이 의견은 소수에 불과했다. 특히나 고대에는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백두산 근처를 영토로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 [[조선 (국가)|조선]]에서도 [[태종]] 때에는 고려 시절 영향 때문에 백두산에 소사(小社)로 제사를 올렸다. 하지만 세종 19년([[1437년]])에 사전을 정비하면서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로 하면서, 백두산이 고려의 영토는 아니어도 고려의 천하에는 든다고 했지만, 조선은 좀 더 엄격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의 천하'''를 이야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영토가 아닌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릴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 시절에도 양성지는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제사를 올리자고 주장하였으나 이 의견은 소수에 불과했다. 특히나 고대에는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백두산 근처를 영토로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 ||
하지만 그런데도 조선에서도 백두산을 특별하게 인식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하지만 그런데도 조선에서도 백두산을 특별하게 인식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