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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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정보
원인 협소한 도로에서의 무리한 장갑차 교행 시도

개요

2002년 6월 13일 오전 9시 50분경,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의 한 지방도로에서 조양중학교에 다니도 있던 고 신효순 양(당시 14세)과 심미선 양(당시 14세)이 주한 미군 궤도 장갑 차량 M60 AVLM에 깔려 사망한 사건이다.

과정

사건이 일어나기 전

때는 2002년 6월 13일, 어릴 적 부터 친한 동네 친구였던 고 신효순 양과 고 심미선 양은 이 날 친구 5명과 모여서 의정부에 놀러가기로 약속을 했었다고 한다. 둘은 의정부로 놀러가기 위해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였던 '초가집'이라는 식당에 가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들의 친구 중 한 명이 이 음식점에서 살고 있었던 것. 따라서 이 둘은 들뜬 마음을 안고 오전 9시 40분경, 56번 지방도로의 갓길을 타고 조심스럽게 길을 나선다.

사건의 발단

그런데 하필이면 이 날, 주한 미군이 훈련을 마치고 덕도삼거리 부근 집결지로 행진을 하게 되는데... 둘이 걷고 있던 56번 지방도로를 경유지로 삼게 되고, 미2사단 44공병대 소속 궤도 장갑차량 5대와 안내 차량 2대, 총 7대의 차량이 집결지를 향해 행진을 시작한다.[1] 이 때의 시각은 사고 발생 약 20~30분 전인 오전 9시 20분이었다.

미2사단 44공병대 소속 궤도 차량은 사고 직전의 한 주유소까지 30km/h~40km/h의 빠른 속도로 내달리던 중이었으며, 20km/h의 속도로 두 학생이 걷고 있던 오르막 급커브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들이 행진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맞은편에서 '브래들리 궤도 장갑차량' 5대가 똑같이 행진을 하고 있었다. 장갑차량이 서로 교행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 하지만 도로의 폭은 이 2대의 장갑차량이 교행을 하기에도 매우 벅찰 정도로 좁았는데, 사고 당시 해당 도로의 차선 폭은 3.23m로, 폭 3.6m의 궤도 장갑차량 2대가 겨우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2]

사건의 발생

브래들리 장갑차량과의 교행을 위해 미2사단 44공병대 소속 M60 AVLM 궤도 장갑차량은 두 여중생이 걷고 있던 갓길로 접어들게 되고, 이 때 관제병과 운전병은 앞에 걷고 있었던 두 명의 여중생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44공병대 소속 장갑차량 대열의 3번째 차량이 마주오던 브래들리 장갑차량 대열의 2번째 차량과 교행하기 위해 두 여중생이 걷고 있던 갓길로 나가게 되고, 54t 무게의 해당 장갑차량은 여중생을 치고 역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

사고 여파

54t의 장갑차량에 깔린 고 신효순 양과 심미선 양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두 명의 피해자 모두 두개골이 완전히 파손되고 늑골과 골반골이 으스러지는 등의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특히 심미선 양의 경우 왼쪽 다리 쪽을 심하게 다쳐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였다고 한다...

미군의 사고 처리

미군은 사고 발생 후 한국 경찰에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미군 구급 차량에게만 연락을 하고 사고 발생 시점인 오전 9시 50분경부터 1시간 동안 시신을 방치하였다. 결국 사고 지점을 지나가던 한 차량의 운전자가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오전 10시 45분 한국 경찰에 신고하였으며 사고 발생 후 한 시간이나 지난 오전 10시 55분, 한국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게 된다. 시신은 오전 10시 58분,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서야 수습되었다. 미군의 미흡한 사고 처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

사고의 의문점

물론 해당 여중생들이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긴 했으나, 사고 15초 전, 전차장이 운전병에게 위험 상황을 4번이나 알렸다고 한다. 그러나 운전병의 진술은 자신은 4번째 경고밖에 듣지 못했다고 하며, 그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고. 물론 통신기기가 먹통이 되는 상황은 생각보다 흔하긴 하지만, 당시 행진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해당 통신기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며, 이에 따라 그럼 어떻게 사고 15초 전에만 먹통이 되냐며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도 모자라 마주오던 브래들리 장갑차량에서도 사고 장갑차를 향해 지속적으로 위험상황을 알렸다고 한다. 사고 장갑차량은 사고 전까지 2대의 브래들리 장갑차량과 교행을 하였으므로, 최소 2번의 위험 경고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냈다는 것에 해당 운전병은 이 경고를 보지 못한 것인지, 더 나아가서 무시한 것인지 등의 많은 의문점을 들게 만들었다.

사고 이후

사건은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분위기에 의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사고 발생 이후 미군 측에서는 해당 사고 차량의 운전병 및 관제병을 과실치사죄로 군사법원에 기소하였으며, 주한 미군 사령관이 사고에 대하여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미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해당 운전병과 관제병은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미군 측에서는 이들은 성실히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본의 아니게 우연히 사고를 낸 것이라는 이유로 운전병과 관제병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것. 이 판결이 남으로써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분노에 휩싸였고, 국내 반미 감정이 극대화되었던 것도 이 사건이 한 몫 해주었다. 당시 광화문 광장에서도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시위를 했으며, 몇몇 국민들은 미군 부대에 직접 찾아가서까지 시위를 하기도 했다. 물론 마음을 먹고 장갑차량으로 여중생들을 역과한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그렇게 좁은 도로에서 덩치가 큰 장갑차량 2대의 교행을 시도한 것 부터가 이미 예견된 행위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기억되고 있으며,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게 된 두 명의 여중생 역시 현재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2020년 4월 30일에는 사고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공원의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원의 모양은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피해자들의 운동화 한 짝의 모양을 본떠 설계되었다고 한다.

각주

  1. 맨 앞에 안내 차량 1대, 가운데 장갑차량 5대, 그리고 맨 뒤에 안내 차량 1대가 따라오는 형태였다.
  2. 양쪽 갓길이 50cm 정도 되므로 약 7.5m 가량의 공간이 확보되니 이 2대의 장갑차가 간신히 교행할 수 있는 정도였다.
  3. 사고 장갑차량 시점에서는 여중생들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주오던 브래들리 차량의 시점에서는 여중생이 보였을 확률이 높다.

틀:대한민국의 도로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