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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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당시 정세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한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일상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약탈했다. 몽골비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이처럼 당시 정세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한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일상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약탈했다. 몽골비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인용문|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br>
{{인용문|<poem>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br>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br>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br>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br>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br>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br>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br>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ref>몽골비사, 무당 쿠쿠추가 보르테를 변호하며.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c7U5&articleno=970 에서 인용.</ref>}}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ref>몽골비사, 무당 쿠쿠추가 보르테를 변호하며.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c7U5&articleno=970 에서 인용.</ref></poem>}}


==칭기스 칸의 등장==
==칭기스 칸의 등장==

2015년 7월 25일 (토) 20:32 판

틀:학술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은 세계 제국
몽골 제국과 현대 몽골의 영토

몽골 제국(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예케 몽골 울루스)은 1206년 몽골리아에서 발흥한 유목 제국이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의 지도 하에 몽골 제국은 급속도로 팽창하여 동유럽에서 중국에 이르는 제국을 이루었다. 몽골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13세기 무렵을 팍스 몽골리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몽골 제국의 지배 하에 유라시아 전역의 교류는 매우 활발해졌으며, 상업 경제 역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라시아 세계"가 성립되었다.

14세기 중반부터 각 지역의 몽골 정권들이 약화되고 붕괴되면서 몽골의 시대는 마무리를 고했으나, 몽골의 지배는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몽골인의 몽골리아 이주

훌룬부이르 지역

몽골리아 초원은 몽골인의 이름을 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 지역이 항상 몽골인의 영역이었던 것은 아니다. 4세기 경 투르크계 유목민 고차가 유입된 이후 6세기부터 9세기 중반까지 투르크계 유목 제국인 돌궐위구르가 몽골리아를 지배했다. 당시 몽골계 유목민 세력은 훌룬-부이르 지방을 경계로 몽골리아 초원 동쪽에 머무르며 투르크계 유목 제국들과 대립했다. 이들은 구당서 등의 중국 기록에서 '실위(室韋)'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실위 내에 속하는 집단 중 몽올(蒙兀) 실위가 후에 "몽골"이라고 불리게 되는 집단이라고 추정된다. 몽올 외에도 달단(達靼) 실위 등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눈에 띄는데, 이들이 바로 타타르였다. 타타르는 돌궐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 인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에야 몽골계 유목민들은 서서히 몽골리아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이동한 집단은 타타르였다. 이들은 10세기 후반 이미 몽골리아 중앙부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

요나라의 세력 판도

"몽골"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이주는 훨씬 늦어 12세기 중반 무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인들의 특징적 매장 양식[2]의 분포를 살펴 보면 이들의 분포를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은 아르군 강 유역에 머물다 11세기 무렵에는 오논 강 하류에, 12세기 중반 무렵에는 오는 강 중류 유역에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3] 몽골인들의 이주가 늦은 것은 앞서 자리잡은 타타르가 위협을 가했을 뿐 아니라, 10세기 전반 몽골 초원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거란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주에서 몽골리아 동남부에 걸친 요나라를 건설한 거란인들은 장벽을 건설하고, 요새를 구축하는 등 타타르를 비롯한 몽골계 유목민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1125년 요가 멸망하면서 몽골인들의 몽골리아 진출을 막던 힘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11세기 이후 북방 고원의 기후가 한랭화되자 몽골인들은 유목 생활의 영위가 어렵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본격적으로 몽골리아 초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12세기 후반~13세기 초 몽골리아의 정세

12세기 후반 각 울루스의 분포

11세기 초원 기후의 한랭화, 위구르 붕괴 이후 몽골리아 전체를 다스리는 강력한 유목 제국의 부재 등으로 12세기 초원의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사회였다. 전쟁과 약탈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 좀 더 강한 집단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집단 간에도, 개인 간에도 좀 더 수직적인 질서가 들어섰다. 세월이 흐르면서 몽골리아는 몇 개의 거대 '울루스'의 세력권으로 나뉘게 되었다.

울루스는 몽골리아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울루스는 '오복'들의 연합체였다. 오복(Oboq)은 한 가문이 이끄는 유목민 사회의 단위로, 대체로 "씨족", "가문"으로 번역된다. 울루스의 지배층은 여러 오복들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통솔하며 국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단, 울루스는 영역 국가의 개념이라기보다 사람의 집합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지녔다.[4]

북방에는 삼림 지역에 접한 오이라트와 메르키트 울루스가 있었으며, 동쪽에는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타타르 울루스가 자리했다. 타타르는 중국과 접한 위치에서 교역과 약탈을 수행하기 용이했으며, 철 산지를 장악하여 매우 강력한 세력으로 군림하였다. 타타르 동북방에 몽골 울루스가 위치했다. 몽골인들은 몽골리아에 늦게 진출하였지만 전쟁을 통하여 서서히 영역을 확장시켜 부르칸 칼둔 산 부근에 근거지를 두었다. 타타르의 서쪽에는 케레이트 울루스가 있었다. 케레이트 울루스 서쪽, 알타이 산맥 부근에 나이만 울루스가 있었다. 나이만 울루스의 귀족층은 투르크 계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구르와 교류하며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다.[5]

몽골 울루스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금의 건국 이후 초원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변경 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1135년부터 시작된 약탈전은 1139년 몽골군이 금 토벌군을 격파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몽골군은 금의 요새 20여 개를 점령하는 등 금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결국 1146년 금과 몽골 사이에 화평 조약이 체결되었다. 금이 몽골 지도자 올룬 베일레(카불)을 몽골 국왕으로 임명하고 매년 콩, 소, 양, 쌀을 보내겠다는 조건의 조약이었다. 카불은 몽골 전체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금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금나라는 각 울루스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몽골 울루스를 견제한다. 카불 칸의 뒤를 이은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인들에게 붙잡혀 금나라로 압송되었으며, 금나라에서 나무 나귀에 못박혀 처형된다. 그는"너희들의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다 빠지도록, 너희들의 열 손가락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나의 원수를 갚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6]

이처럼 당시 정세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한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일상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약탈했다. 몽골비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7]

칭기스 칸의 등장

버려지다

예수게이 (상상도)

칭기스 칸은 보르지긴 오복 출신이며, 이름은 테무진이다. 12세기 중반 이후 카불 칸, 암바가이 칸, 쿠툴라 칸 등 보르지긴 오복의 지도자들은 몽골 울루스 전체의 칸을 칭했다. 그러나 쿠툴라 칸 사후 보르지긴 오복은 쪼개졌다. 암바가이 칸 가문인 타이치우트와 카불 칸 가문인 키야트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는 키야트, 암바가이 칸의 손자 타르쿠타이는 타이치우트를 각각 이끌었다. 두 가문은 협력을 하기도 했지만 갈등하는 일도 많았다. 어느 한 쪽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어 보르지긴 오복 전체를 대표하며 몽골의 칸을 칭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인들에게 독살당하면서 보르지긴 오복의 주도권이 타이치우트로 넘어간다. 예수게이의 맏아들이었던 테무진의 일족은 순식간에 그들을 따르던 전사들과 친족 대부분에게 버림받게 된다. 테무진이 성장하자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친족들이 그의 일족을 공격하여 그를 포로로 잡는 일까지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돌아온 그의 곁에는 동생들과 어머니 뿐, 지지 세력이라고는 없었다. 테무진은 이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8]

그림자말고는 벗도 없고, 꼬리말고는 채찍도 없다

이족과의 연합

울란바토르에 있는 보오르추의 동상

테무진 일족은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족(異族)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생전에 정혼해준 보르테(ᠪᠥᠷᠲᠡ)와 결혼이 그 시작이었다. 혼인을 통해 두 가문이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을 "쿠다(Quda)"라고 불렀다. 보르테는 콩키라트(옹기라트라고도 불림)라는 집단 출신이었다. 이들은 유력 세력은 아니었으나, 중국과의 교역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 부를 누렸다. 테무진은 아버지와 의형제 관계를 맺은 토그릴(후에 옹 칸이라는 칭호를 받음)에게 찾아갈 때 혼수품으로 받은 모피 외투를 바쳤는데, 콩키라트와의 연합을 통하여 얻은 부를 활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토그릴은 케레이트 울루스의 군주로, 예수게이와 의형제, 즉 '안다(Anda)'를 맺은 사이였다. 언급했듯 테무진은 모피 외투를 들고 그에게 찾아가 의부자 관계를 확인받았다. 안다는 피로 맺어진 형제라는 의미로, 안다를 맺은 사이에는 서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안다는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두 집단 간의 매우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의미했다. 테무진 스스로도 여러 집단의 지도자들과 안다를 맺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자지라트의 지도자 자무카와의 관계였다. 보르테가 1184년 약탈당했을 때 자무카는 테무진을 도와 보르테를 되찾아왔으며, 이후 테무진 일족과 자무카는 한동안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망쿠트의 지도자 쿠일다르와도 안다를 맺었다. 쿠일다르는 케레이트와의 전투에서 테무진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

그 외에도 '친구, 벗' 등을 뜻하는 누케르(nöker)라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테무진과 처음으로 누케르가 된 사람은 보오르추였다. 보오르추는 말을 도둑맞은 테무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말을 빌려주었으며, 말 도둑을 함께 추적해 말을 되찾도록 도와주었다. 누케르는 평등한 관계로, 단순한 친구 관계를 넘어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 동맹의 성격 역시 지녔다. 테무진이 칭기스 칸으로 즉위한 후에는 누케르의 성격이 평등한 관계에서 주종관계로 변화하였다. 칭기스 칸의 누케르들은 칭기스 칸에게 충성하는 전사 집단으로 활약하며 신생 몽골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9]

초원의 지배자로

칭기스 칸

1182년, 테무진은 생존을 위해서 아버지와 안다를 맺었던 토그릴에게 찾아가 의부자 관계를 확인받았다. 옹 칸은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케레이트 울루스의 군주였다. 케레이트와의 연합으로 테무진 일가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허덕이지는 않게 되었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테무진 일가에 다시 고난이 닥친 것은 1184년이었다. 예수게이는 후엘룬을 메르키트로부터 약탈하여 결혼했는데, 이 일 이후로 메르키트는 예수게이의 일족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1184년, 메르키트는 테무진 일가를 습격하여 그의 아내 보르테를 약탈한다.

아직도 이렇다 할 지지 세력이 없던 테무진은 토그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때 테무진은 혼수품으로 받았던 모피 외투를 옹 칸에게 바치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토그릴은 테무진에게 2만의 병력을 주었으며, 자무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10] 자무카는 테무진과 어릴 적 안다를 맺은 사이로, 당시 막 자지라트 (쟈다란이라고도 불림)의 군주로 올라선 상태였다. 자무카는 흔쾌히 테무진을 도와 메르키트를 공격했다. 토그릴과 자무카의 협력으로 테무진은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보르테를 되찾은 기쁨도 잠시, 테무진은 곧 보르테가 임신을 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 보르테는 메르키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칠게르라는 인물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 때문에 보르테가 밴 아이가 칠게르의 아이인지, 테무진의 아이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보르테가 아이를 낳자 테무진은 이름을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Jöchi)'로 짓고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이로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주치의 혈통 문제는 칭기스 일족 내에서 분쟁의 씨앗으로 남게 된다.

이후 테무진 일족과 자무카는 같이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둘 사이는 점차 악화된다. 테무진이 점차 세력을 불려나가면서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결국 테무진은 1186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친족들만으로 구성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즉위한다 (1차 즉위). 그러나 이는 이름 뿐인 즉위였다.

1187년, 테무진은 자무카와 타이치우드 세력 연합군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를 달란-발주트 전투라고 부른다. 이 전투에서 테무진은 대패를 당한다. 케레이트 울루스의 토그릴 역시 실각하여 서요(카라키타이)로 쫓겨났다. 테무진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까지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초원 사회의 재정비

테무진은 1206년 실질적인 몽골리아 통일을 완수하고 칭기스 칸으로 추대된다 (2차 즉위). 이후 그는 기존 초원 사회의 질서를 대대적으로 개편해나갔다.

정벌과 회유

금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

우구데이 카안의 치세

칭기스 칸의 사망

즉위 배경

통치 기구의 정비

뭉케 대칸의 치세

구육의 즉위와 사망

뭉케의 즉위

동방 정벌

서방 정벌

쿠빌라이의 즉위

후계자 다툼

"4칸국"의 성립

팍스 몽골리카

몽골 제국의 붕괴

영향

각주

  1.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p. 79.
  2. 북두위신전장(北頭位伸展葬)
  3.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pp. 80~82.
  4.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저,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 소나무, 2005, p.192.
  5.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p. 87.
  6. 몽골비사
  7. 몽골비사, 무당 쿠쿠추가 보르테를 변호하며.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c7U5&articleno=970 에서 인용.
  8. 몽골비사
  9.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p. 99.
  10. 몽골비사. 실제로 2만이나 되는 병력을 주었는지는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