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전개 == === 새천년민주당 후보 선출 === [[파일:광주경선노무현.jpg|250픽셀|섬네일|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직후, 지지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시켜서 '''여당'''이 된 [[새천년민주당]]은 차기 대통령 후보를 고심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새천년민주당은 사상 최초로 당내 경선을 '''국민참여경선''' 방식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본래 경선에는 당에 회비를 납부하는 당원들만 참가할 수 있었으나, 이번 경선에서는 당원이 아닌 일반국민들도 경선에 일부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당원과 일반국민의 표 비율은 1:1로 정하였다. 또한, 경선을 한날 한시에 한꺼번에 시작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16개 지역을 돌아다니며 치러지는 지역순회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경선은 '''각본 없는 16부작 드라마'''라고 불리며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경선 직전까지만 해도 새천년민주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는 [[이인제]]가 무난히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인제는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선거|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제3후보로 출마하여 1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과시하였고,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젊고 경쟁력 있는 후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MBC 앵커 출신인 [[정동영]], 영남 후보 [[김중권]], 리틀 DJ [[한화갑]] 등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럼 [[노무현]]은? 김대중 정권 동안 [[해양수산부]] 장관 자리를 7개월 동안 맡은 것 외에는 딱히 한 일도 없었고, 사실상 [[듣보잡]]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경선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 제주경선 ([[2002년]] [[3월 9일]]) :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한화갑]]이 175표로 1위, [[이인제]]가 172표로 2위를 차지하였다. 노무현은 125표로 깜짝 3위를 차지하였으나, 사람들의 관심사항은 아니었다. # 울산경선 ([[3월 10일]]) : 영남후보론이 이슈로 떠오르고, 자연스레 김중권과 노무현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노무현은 청중을 압도하는 연설 솜씨를 보여주며 298표로 1위, 김중권은 281표로 2위를 차지하였다. # 광주경선 ([[3월 16일]]) : 광주는 민주당의 정신적 수도인 만큼, 광주경선은 대통령 후보 선출의 판도를 결정짓는 무대로 여겨졌고, 실제로도 그랬다. 당초 선전이 예상되던 [[이인제]] 후보는 그동안의 철새정치인 행보로 정체성 시비의 직격탄을 받았고, 민주당의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영남표가 절실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영남 후보인 [[노무현]]이 595표로 1위를 차지하고, 이인제는 491표로 2위에 머물게 된다. 경선에 앞서 [[3월 13일]]의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후보가 나오고 새천년민주당에서 이인제 후보가 나오면 이회창이 당선되지만, 노무현 후보가 나오면 노무현이 당선될 것으로 나타난 것이 노무현 돌풍('''노풍''')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 대전경선 ([[3월 17일]]) : 이인제의 연고지인 만큼, 이인제가 894표로 압도적인 1위, 노무현이 219표로 2위를 차지하였다. # 충남경선 ([[3월 23일]]) : [[한화갑]]은 당초 기대와는 달리 참패가 예상되자, 경선을 포기한다. 이인제의 고향(충남 [[논산]])에서 치러진 경선 결과 이인제가 1432표로 압도적인 1위, 노무현이 277표로 2위를 차지하며 노풍은 위기를 맞는다. # 강원경선 ([[3월 24일]]) : 이제 대결은 노무현 VS 이인제 대결로 압축된다. 노무현이 630표로 1위, 이인제가 623표로 2위를 차지한다. # 경남경선 ([[3월 30일]]) : [[김중권]]이 경선을 포기하면서 이제 노무현은 유일한 영남 후보가 되었다. 노무현의 고향(경남 [[김해]])에서 치러진 경선인 만큼, 노무현이 1713표로 압도적인 1위가 되고, 이인제는 463표에 머문다. 경남경선은 노무현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경선이 되었다. # 이후 노무현은 노풍을 이어가며 전북, 대구, 인천, 경북, 전남, 부산, 서울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이인제는 연고지인 [[충북]]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나 곧 망조의 조짐을 느끼고 부산 경선 직전에 경선을 포기한다. 그렇게 노무현은 각본 없는 16부작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된다([[4월 27일]]).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차기대통령 자리만을 바라보던 이인제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나타나 하루아침에 대통령후보 자리를 빼앗은 노무현이 곱게 보일 리 없었고, 속으로 '''노무현 타도'''를 외쳤다. 노풍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차적으로는 [[노사모]]로 대표되는 인터넷 정치인 팬클럽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무현의 행적-5공 청문회에서의 활약, 3당 합당 거부('''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지역타파 노력(번번이 낙선하면서도 총선에서 부산 지역구에 지속적으로 출마)은 당시 신문물이었던 인터넷을 통해 젊은 유권자([[386세대]])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나갔다. 결국 노풍의 근원지는 인터넷이었던 셈이다. === 한나라당 후보 선출 ===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이 국민경선을 도입하여 흥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같은 방법으로 치러지는 국민경선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는 당내에서 거의 독재자급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회창이 너무나도 싱겁게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 정몽준의 등장, 노풍의 위기 === [[파일:히딩크정몽준.jpg|250픽셀|섬네일|[[터키]]와의 3-4위전 직후, [[거스 히딩크]]를 만나고 있는 [[정몽준]]]]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후보가 정해진 직후인 [[5월 2일]]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의 지지율은 43%, 이회창의 지지율은 32.9%로 노무현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큰 지지율 격차는 새천년민주당 경선 흥행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임기 말기에 이르러 김대중의 세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최규선 게이트 등의 측근비리가 불거지자 노풍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del>잘못은 김대중 측근이 하고, 욕은 노무현이 먹고...</del> 이 와중에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이 4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전 국민은 축구에 잠시 미쳐있었다. 그 결과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성공에 큰 공을 세운 [[정몽준]] FIFA 부회장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고, 드디어는 '''정몽준을 대통령으로!'''라는 목소리도 나오게 된다. 월드컵 개최 도중에 치러진 [[제3회 지방선거]]([[6월 13일]])에서는 노무현이 이끄는 새천년민주당은 광주, 전남, 전북, 제주에서만 광역단체장 자리를 지켜내었을 뿐, 수도권과 영남 지역에서 모두 패배하여 민주당이 지방선거 사상 최악의 참패를 겪었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이 월드컵에 정신이 팔려 있던 터라 낮은 투표율이 나왔고, 이것이 민주당 참패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나, 아무튼 선거 패배의 일차적 책임자인 노무현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선거를 불과 3달 남겨둔 [[9월 5일]]의 여론조사에서는 이회창의 지지율이 30.2%, 정몽준의 지지율은 29.6%인데 비해 노무현의 지지율은 17.6%에 머물면서 여당 대통령 후보를 '''월드컵 스타''' 정몽준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 [[파일:노무현정몽준.jpg|250픽셀|섬네일|포장마차에서 소주잔으로 <del>배반의</del> 러브샷을 하고 있는 [[노무현]]과 [[정몽준]]]] 여당에서는 결국 노무현과 정몽준을 후보 단일화시키기로 결정한다. 처음에는 지지율이 높던 정몽준 후보가 더 유력해 보였으나, 이후 [[노사모]]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11월 24일]]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정몽준을 앞서나갔고, 결국 대통령 후보는 노무현으로 단일화 되었다. 단일화 직후인 [[11월 26일]]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35.2%, 노무현 42.2%'''로 나타나면서 노무현의 당선이 점쳐지기 시작하였다. 노무현과 후보단일화를 이룬 정몽준은 노무현을 따라 유세를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 TV 토론 === TV 토론은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의 세 명의 후보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노무현의 행정수도 충청 공약을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민주노동당]] 소속의 제3후보인 권영길은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주목을 받았다. === 병풍 시즌2 === 지난 선거에 아들의 병풍(兵風, 병역비리 의혹)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이회창은 이번 선거에서는 좀 잠잠해...질 줄 알았으나, 갑자기 [[김대업]]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체중이 미달된 것으로 나타난 진단서 자체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나중에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김대업은 관심종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미 이회창의 대쪽 이미지에는 금이 간 후였다. === 선거 광고 === *노무현 후보의 CF 노무현 후보의 상록수 CF는 '''감성 마케팅'''이라는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386세대들이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며 불렀던 노래 ‘상록수’를 노무현이 직접 기타를 치며 부르는 모습은 386세대의 많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유튜브|bPkwANAbbNE}} *이회창 후보의 CF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한 순간의 인기에 따라서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정치계에서 충분히 검증받은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노무현에 비유한 첫 번째 버스기사가 결국 끔찍한 교통사고를 내고 마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을 넣음으로서 유권자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하였다. {{유튜브|YhDbpg5s5As}} ===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선언 === 그렇게 선거는 노무현 굳히기가 되는 듯 했으나... 선거일을 하루 앞둔 [[12월 18일]]에 있었던 사건은 선거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12월 18일]] 저녁, 노무현과 정몽준은 서울 명동에서 마지막 합동 유세를 하고 있었다. 정몽준은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긴 하였으나, 그래도 마음속에 '''차기 대통령은 내꺼'''라는 소망을 품고 나름 열심히 노무현의 당선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유세지에서, 노무현은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든 사람을 발견하고, 이런 발언을 하였다. '''“너무 속도위반하지 마라. 제가 새로운 정치하지 않고 어물어물하면 제 멱살을 잡고 흔들 우리 여자 지도자 추미애<ref>근데 <s>추다르크</s>추미애는 2004년 노무현 탄핵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어찌보면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ref> 가 있다. 또 제가 흔들릴 때 제 등을 받치면서 민주주의 정통성을 살려야 한다고 한 정동영 고문은 어떠냐. 또 몇 사람 있다.”''' 이 발언을 들은 정몽준은 노무현에 대한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으며(한 마디로 삐쳤다), 결국 선거일을 불과 1시간 30여분 남겨둔 [[12월 17일]] 오후 10시 30분,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선언하였다(철회 선언을 할 때에는 다른 핑계를 댔음). 이에 깜짝 놀란 노무현은 12월 18일 새벽 평창동 정몽준의 집앞까지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만나기 싫다]]"는 대답만 듣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되어버리는데..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유튜브 영상이 포함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