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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 중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대체적으로 공자사후 2~30년 내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다른 경전과 달리 한 사람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주로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놓은 형태를 띄고 있다. | ||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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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fr:Simon Leys|시몬 레이즈]]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fr:Simon Leys|시몬 레이즈]]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 ||
조선시대에는 [[훈민정음]]의 반포로 언해가 시작되었는데, [[조선 | 조선시대에는 [[훈민정음]]의 반포로 언해가 시작되었는데, [[세종_(조선)|세종]]대에는 사업이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조선 전기의 학자 유숭조가 최초로 칠서언해를 내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언해사업은 [[선조_(조선)|선조]]의 명에 따라 교정청을 두어 사서삼경과 효경 등을 언해하였는데, 그 결과 칠서언해의 하나로 1590년(선조 23년) 총 4권의 논어언해가 간행되었다. 논어언해는 실제로 백성을 교화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 그 수요가 많아 이후에도 광해군, 인조, 숙종대 등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또한 '{{첫가끝|ㅿ, ㆁ}}'과 방점이 사용되는 [[중세 한국어]]의 특징을 보여주고 원간본의 '{{첫가끝|ᄀᆞᆮ디 몯ᄒᆞ다}}' 가 [[인조_(조선)|인조]] 목판본(1631년판)에서는 '{{첫가끝|ᄀᆞᆺ디 몯ᄒᆞ다}}'로 수정되는 등 한국어 사용의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논어언해는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원간본을 영인한 1976년 종로대제각 영인본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http://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47977620 1976년 영인본]. 한편 언해본은 1749년([[영조_(조선)|영조]] 25년) 간행된 율곡논어언해도 있다. 이는 율곡 이이가 교정청의 언해사업과는 달리 원문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언해한 것인데, 후대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간행한 것이다. 국한문을 혼용한 언해형태의 번역은 조선시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다가, 광복 후 순한글로 번역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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