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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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 중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대체적으로 공자 사후 2~30년 내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다른 경전과 달리 한 사람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주로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
[[분류:유교]]
[[분류:철학]]
[[분류:동양철학]]
[[분류:사서오경]]
 
*論語
== 개요 ==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 중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대체적으로 공자사후 2~30년 내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다른 경전과 달리 한 사람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주로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놓은 형태를 띄고 있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 구성 및 본문==
== 구성 및 본문==
현재 논어는 전20편, 총 482장 {{--|또는 498 내지 499장}}<ref>논어 원문 자체는 분장이 되어있지 않았으나, [[주희]]의 『논어집주』에서 분장한 것이 통용되고 있다. 단, 여기서도 『논어집주』 향당편에서 '舊說凡一章, 今分爲十七節.'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구설을 따르면 향당편 전체가 1장이 되어 총 482장이라 할 수도 있고, '今分爲十七節'을 주희가 '17등분했다'고 해석하면 17장이 되어 총 498장이 된다. 그런데 향당편 '색사거의'장이 주희의 17절 개념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파악하면 1장이 더 추가되어 총 499장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현대에도 학자마다 502장, 499장, 492장, 509장 등 492장부터 513장까지 다양하게 분장하고 있다.</ref>, 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논어는 전20편, 총 498장<ref>논어 원문 자체는 분장이 되어있지 않았으나, [[주희]]의 『논어집주』에서 분장한 것이 통용되고 있다. 단, 여기서도 『논어집주』 향당편에서 '舊說凡一章, 今分爲十七節.'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구설을 따르면 향당편 전체가 1장이 되어 총 482장이라 할 수도 있고, '今分爲十七節'을 주희의 견해라고 파악하면  향당편이 17장이 되어 총 498장이라 할 수도 있다. 현대에도 학자마다 502장, 499장, 492장, 509장 등 492장부터 513장까지 다양하게 분장하고 있다.</ref>, 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파일:Rongo Analects 02.jpg‎|thumb|논어]]
[[파일:Rongo Analects 02.jpg‎|thumb|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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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역사 ==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 (前漢)의 6대 [[전한 경제|경제]] (BC 188 - BC 157 - BC 141) ~ 7대 [[전한 무제|무제]] (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 (前漢)의 6대 [[전한 경제|경제]] (BC 188 - BC 157 - BC 141) ~ 7대 [[전한 무제|무제]] (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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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fr:Simon Leys|시몬 레이즈]]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fr:Simon Leys|시몬 레이즈]]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조선시대에는 [[훈민정음]]의 반포로 언해가 시작되었는데, [[조선 세종|세종]]대에는 사업이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조선 전기의 학자 유숭조가 최초로 칠서언해를 내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언해사업은 [[조선 선조|선조]]의 명에 따라 교정청을 두어 사서삼경과 효경 등을 언해하였는데, 그 결과 칠서언해의 하나로 1590년(선조 23년) 총 4권의 논어언해가 간행되었다. 논어언해는 실제로 백성을 교화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 그 수요가 많아 이후에도 광해군, 인조, 숙종대 등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또한 '{{첫가끝|ㅿ, ㆁ}}'과 방점이 사용되는 [[중세 한국어]]의 특징을 보여주고 원간본의 '{{첫가끝|ᄀᆞᆮ디 몯ᄒᆞ다}}' 가 [[조선 인조|인조]] 목판본(1631년판)에서는 '{{첫가끝|ᄀᆞᆺ디 몯ᄒᆞ다}}'로 수정되는 등 한국어 사용의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논어언해는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원간본을 영인한 1976년 종로대제각 영인본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http://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47977620 1976년 영인본]. 한편 언해본은 1749년([[조선 영조|영조]] 25년) 간행된 율곡논어언해도 있다. 이는 율곡 이이가 교정청의 언해사업과는 달리 원문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언해한 것인데, 후대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간행한 것이다. 국한문을 혼용한 언해형태의 번역은 조선시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다가, 광복 후 순한글로 번역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훈민정음]]의 반포로 언해가 시작되었는데, [[세종_(조선)|세종]]대에는 사업이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조선 전기의 학자 유숭조가 최초로 칠서언해를 내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언해사업은 [[선조_(조선)|선조]]의 명에 따라 교정청을 두어 사서삼경과 효경 등을 언해하였는데, 그 결과 칠서언해의 하나로 1590년(선조 23년) 총 4권의 논어언해가 간행되었다. 논어언해는 실제로 백성을 교화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 그 수요가 많아 이후에도 광해군, 인조, 숙종대 등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또한 '{{첫가끝|ㅿ, ㆁ}}'과 방점이 사용되는 [[중세 한국어]]의 특징을 보여주고 원간본의 '{{첫가끝|ᄀᆞᆮ디 몯ᄒᆞ다}}' 가 [[인조_(조선)|인조]] 목판본(1631년판)에서는 '{{첫가끝|ᄀᆞᆺ디 몯ᄒᆞ다}}'로 수정되는 등 한국어 사용의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논어언해는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원간본을 영인한 1976년 종로대제각 영인본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http://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47977620 1976년 영인본]. 한편 언해본은 1749년([[영조_(조선)|영조]] 25년) 간행된 율곡논어언해도 있다. 이는 율곡 이이가 교정청의 언해사업과는 달리 원문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언해한 것인데, 후대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간행한 것이다. 국한문을 혼용한 언해형태의 번역은 조선시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다가, 광복 후 순한글로 번역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 좋은 구절 ==
{{인용문|<big>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big><br/>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br/>군자는 서로 화합하면서도 같지 않고, 소인은 서로 같지만 화합하지 않는다.}}
군자는 서로 화합하면서도 같지 않고 소인은 화합할 줄 모르면서 같음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군자는 서로 화합하며 모두 획일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며 소인은 획일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며 화합할 줄 모른다고 볼 수 있다.
 
{{인용문|<big>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big><br/>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br/>공자가 말씀하시길 유야 내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주석}}
{{주석}}
{{퍼온문서|논어||일부}}
[[분류:유교]]
[[분류:동양철학]]
[[분류:사서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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