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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들어 북한의 핵개발이 국제적으로 초미의 관심을 끌었고, [[1991년]] [[9월 25일]], 노태우는 [[UN]]총회 연설을 통해 북한에 대해 핵무기개발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고 한반도의 핵문제에 대해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미온적인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1991년]] [[11월 8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어 한반도에서의 핵부재<ref>[[주한미군]]의 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철수시킨다는 내용</ref>를 선언하며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명분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북한에 대해 [[핵확산금지조약]]의 회원국으로서의 의무이행인 안전담보협정의 서명과 핵사찰 수락을 촉구했다. 이후 남북한은 [[1991년]] [[12월]], 한반도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세 차례의 남북 고위급회담을 개최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통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조국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마련하자는 공통된 취지에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전문과 6개항으로 된 〈비핵화 공동선언〉은 [[1991년]] [[12월 31일]] 채택된 뒤 [[1992년]] [[2월19일]] 제6차 고위급회담<ref>[[평양]]에서 개최</ref>에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발효됐다. 노태우 정부의 이런 적극적인 대북정책은 당시 북한의 대남도발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1992년]] [[10월]]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개최된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한 책임있는 대화를 통한 화해노력이 높게 평가받는다. 특히 [[1991년]] [[9월 17일]], <남북한 [[UN]] 동시가입>은 노태우 정부 대북정책의 최대 성과로 평가받는다. ===한미 관계=== 1990년대 초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한·미 양국간의 [[팀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은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국방부]]는 [[1991년]] [[12월 16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담보협정에 서명하고 핵사찰에 응한 뒤 남북한 동시 핵사찰을 받아들이면 팀스피리트 훈련을 유보내지 전면 재조정할 수 있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이후 북한 핵 문제와 남북한 관계개선의 흐름에 따라 1984년 이후 매년 20만명 이상이 참가하여 치러지던 팀스피리트 훈련에 대해 1992년 처음으로 잠정적 중단 선언조치가 이루어졌다. 1991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제23차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SCM)는 한반도와 국제질서의 변화, 즉 한소수교와 구소련의 해체,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넌·워너(Nunn·Warner) 2차보고서 의회제출, 북한위 핵개발 임박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3차 SCM은 북한 핵포기시까지 제2단계 주한미군 감축 유보, 전시지원협정(WHNS)의 체결, 한미간 군수·방산·기술협력문제의 협의를 진행시켰다. 한편,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이래로 한국의 미국간의 외교관계는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화,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에 따른 국제적 지위향상 및 미국 국내의 사정변화를 반영하면서 안보 및 경제, 통상 협력 분야에서의 관계조정을 통한 성숙한 동반자 관계의 수립,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와 협력을 도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한일 관계=== 노태우 정부하의 일본과의 관계는 문화역사적인 측면이나 안보국방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는 항상 역사적인 측면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지만, 노태우 정부의 시기는 냉전의 종식과 맞물리면서 변화의 흐름도 감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당시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역사문제가 계속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반면, 북일관계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면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북방외교===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외교적 성과는 [[소련]], [[중국]]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포함하는 '''북방외교'''이다. 노태우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력신장과 국제적 지위 향상에 따라 북한에 대한 우위가 명백해지고 [[냉전]] 종식등 국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동안의 경쟁·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을 개방시키려는 선도적인 대북관계를 모색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1988년]] [[7월 7일]] 노태우는 남북관계 및 동구권 외교를 비롯한 북방정책에 있어서 새로운 통일정책의 기본방향을 밝혔다. [[7·7선언]]은 북한과의 적대·대결관계를 청산하고 민족공동체의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하고, 북한과 우방간의 관계개선을 적극도우며, 우리나라도 중국·소련 등 공산국가와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해나가겠다는 정책선언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은 민족의 관계에서 북한정책을 전향적으로 전환하고 북방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겨냥한 북방정책이라는 두 개의 정책방향이 상호 연계되어 있다. 이 선언은 북방정책을 대북한 정책과 대북방 외교정책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설정하고 그 대상범위도 북한과 북한의 주요 동맹국인 중국, 소련뿐만 아니라 동구권 및 아시아권 사회주의국가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립하였다. 7·7선언은 냉전시기 두 번의 반쪽 올림픽이었던 [[모스크바 올림픽]]과 [[LA 올림픽]]과는 달리 [[서울 올림픽]]을 동서의 거의 모든 국가들을 참여시킨 전 인류의 스포츠 제전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전개된 동서냉전의 종식 등 세계적인 화해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소련]] : [[1989년]] [[4월]], [[소련]]과 무역대표부를 교환하면서 양국의 수교협상은 급진전되었고, 1990년 2월과 3월에는 한국의 영사처와 소련의 영사처가 모스크바와 서울에 각각 개설됨으로써 사실상의 수교에 이르는 조건들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1991년]] [[4월 19일]]부터 [[4월 20일]]까지 제주도를 방문하여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이 방문은 소련 정상으로서는 최초의 한국 방문이었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맞물리면서 양국의 수교를 향한 관계의 진일보로 이해된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남북관계와 국제관계에서 우리의 가장 큰 과제인 [[UN]]가입 문제가 무난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정상회담에서 한·소 우호·협력에 관한 조약 체결을 제의하였다. 노태우는 이를 수락하고 외무장관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협의토록 했다. ;[[중국]] : [[1992년]] [[8월]] 한·중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어, 근 반세기 동안 지속된 한국과 중국 간에 단절되었던 교류가 재개되었다. 한·중 양국간 국교 수립은 당시 구소련 및 동유럽권 붕괴 이후의 세계적인 탈냉전의 조류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도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과거 반세기 동안에 걸친 부자연스런 단절의 역사를 청산하고 수천 년에 걸친 역사적 교류를 회복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양국간의 새로운 선린·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중국과의 국교 수립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을 정부가 전면 수락함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가 중국과의 수교와 동시에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정부수립과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기에 아시아에서 가장 긴밀한 우방이었던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한때 한국의 적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동구권 : 노태우 정부의 동구권 외교에는 한국과 [[헝가리]]의 수교가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냉전종식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간 노태우 정부는 7.7선언에서의 북한정책 기조 천명과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연설을 통해 사회주의권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쳐나갔고, 이러한 유리한 환경에 힘입어 한국은 [[1989년]] [[2월 1일]]에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이 수교를 계기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로 이어진 한국의 동구 사회주의 국가와의 수교를 견인시켰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