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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은 기존 목표이던 근로자들 말고도 가장 불만이 많던 농부들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와중 나치들은 자신들의 정책 중 가장 논란에 휩싸였던 17번째 조항을 재해석하고, 세금 삭감을 약속하며, 농부들이 가장 싫어하던 공무원들의 월급을 삭감하고 싼 수입 품들을 줄이기로 약속하였다.  {{ㅊ|어라? 요즘 [[한국|어느 나라]] [[개판|정치판]]이랑 비교해보니 변한게 하나도 없네?}}
나치당은 기존 목표이던 근로자들 말고도 가장 불만이 많던 농부들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와중 나치들은 자신들의 정책 중 가장 논란에 휩싸였던 17번째 조항을 재해석하고, 세금 삭감을 약속하며, 농부들이 가장 싫어하던 공무원들의 월급을 삭감하고 싼 수입 품들을 줄이기로 약속'만' 하였다.  {{ㅊ|어라? 요즘 [[한국|어느 나라]] [[개판|정치판]]이랑 비교해보니 변한게 하나도 없네?}}

2015년 5월 9일 (토) 23:56 판

1933년에 나치당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1945년 2차대전의 패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 때의 독일 정부

나치당

나치 독일의 여당이자 유일한 정당. 이하에는 나치당이 설립하고 나서 정권을 잡을 때까지의 내용만이 서술 되어있다.

초기

나치당은 1918년에 창립한 정당으로서, 안톤 드렉슬러가 세운 정당이다. 창립 당시에도 국가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원래는 총 멤버가 60명도 안되는 매우 작은 스케일의 정당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사이즈의 당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바이마르 공화당, 즉 독일이 하도 약한 상태인지라, 이런 작은 당이라고 해도 극단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고, 이를 단속하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라는 병사를 보내 감시하도록 하였다. 근데, 이러한 당의 회의에 참가하던 도중에 히틀러가 바우만 교수라는 사람과 언쟁이 붙고, 승리한 그를 보고 감탄한 당이 그를 555번 멤버가 되었다. 근데 여기서 60명 이하인 당에 가입한 히틀러의 번호가 555인 이유는 모든 참가 인원들의 번호에는 500을 추가하여서 멤버가 많은 척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였다. 히틀러가 가입하고 나서는 모든 것이 변하였다. 나치당은 노동자들을 타겟으로한 정당이 되었고, 땅 소유자의 땅을 빼았아 가난하자들에게 돌려주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야 살 수 있는 땅을 더 만들어나가겠다라는 약속들을 한다. 물론 히틀러는 이들을 지킬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뮌헨 맥주홀 폭동

Munich Putsch

1923년, 11월 9일, 히틀러의 본격적인 첫 번째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방법은 쿠데타. 뮌헨은 베를린에 대한 악감정의 중심지와 다름 없었고, 이것이 엄청 심하여 지역군대장이었던 폰 로쏘우는 베를린 진격을 할 생각도 갖추고 있었다. 이 날, 뮌헨의 총리였던 구스타브 카르 총리, 폰 로쏘우와 경찰 총장이었던 사이서는 뮌헨의 맥주홀에서 우익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연설을 할려던 참이었으나, 히틀러가 600명의 무장한 지지자들과 함께 들이닥친다. 여기서 히틀러는 무력으로 이 셋의 협력을 약속 받고, 잠시 감금해 놨었으나, 카르가 주도하여 탈출, 히틀러의 쿠데타를 제지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나치 당원 14명이 죽고, 이 당원들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여성들은 나치 움직임의 영웅으로 새겨졌다 이게 명예냐 불명예냐? 그리고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어깨가 탈골된다. 히틀러는 카르의 배신 행위를 잊지 않았고, 11년 뒤 긴 칼날의 밤 (The Night of Long Knives)에서 반대파들을 숙청할 때 같이 숙청 되었다. 히틀러는 반역죄로 규정상으로는 사형을 받아도 아무런 할 말이 없지만, 재판을 자신의 선전 연설로 바꾸고, 이에 판사들이 넘어가서 형이 5년으로 줄어버렸다. 어이, 그게 너희들이 할 짓이냐? 그리고 이 5년 동안 히틀러는 자사전인 Mein Kampf (독일어로 대략 '나의 투쟁')의 큰 한 부분을 써내버렸다. 그리고 이 5년 마저도 형감되어서 단 9개월 만에 나왔다. 사형-->5년-->9개월로 변하는 민주주의의 마술입니다 여러분!!! 얼씨구 잘하는 짓이다 무죄 판결 안난게 다행이네.

히틀러는 이 사건 이후 민주주의의 훌륭함을 깨달아서 수감 기간 동안 온 한 면회자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군사적인 반역을 통해 집권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코를 막고 (썩은 내 나는) 가톨릭과 마르크스주의자 인간들이 쌓여있는 라히슈테그(Reichstag,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당시의 의회 같은 곳이다)에 들어가는게 더 좋다. 그렇게 그들을 투표하여 이기는 것이 그들을 쏴 죽이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지라해도, 적어도 그 결과는 그 자들이 스스로 작성한 헌법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다"

집권

나치당이 1925년 이후 1933년에 집권하기까지 과정은 꽤나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기에, 여러 종목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서술한다.

히틀러

그치만 히틀러 없는 나치당은 이 9개월 마저도 못 버텨서 해체 될 만한 수준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풀린 뒤인 1925년 2월에는 다시 세워졌다. 히틀러의 당내의 존재감을 120% 확인 시켜주는 사건이었다. 실패한 뮌헨 폭동 사건 이후 히틀러의 당내 권위나 힘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히틀러가 당내의 완전한 독재자 같은 것은 또 아니였던지라, 히틀러는 이후 1926~1930년 동안 자신의 권력과 방침에 반발하는 사회주의 자들과 대립했어야 됬고, 1930년 10월에는 히틀러의 헌법 위주 방침에 전저리가 난 당 내부의 사회주의자들이 크게 한 판 당내 혁명을 일으키려도 하였다.

또한 히틀러와 나치당하면 히틀러의 연설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히틀러의 연설은 가히 천재적이고 독창적이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의 연설은 당시 듣는 자들을 홀렸으며, 히틀러가 사용한 테크닉의 일부를 살펴보면:

  • 히틀러는 우선 연설에 몇 시간씩 수시로 늦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매우 불규칙적인 생활에서 비롯된 거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늦음으로서 관객에게서 흥분과 불안감을 이끌어내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 히틀러는 매번 연설을 망설이는 듯 시작하였고, 초반은 매우 대화적인 스타일로 시작한다
  • 시간이 지날 수록 히틀러는 점점 억양을 높이고 매우 열정적이고 잊혀질 수 없는 크레셴도 목소리로 연설하며 그의 말에는 그의 영혼이 담겨있는 듯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증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최면을 거는 듯한 눈을 통하여 관중 개개인과 소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
  • 하지만, 매번 이러한 흥분을 나타내어서 자기 감정이 조절 안되는 듯 보이지만, 매번 그의 연설은 아무리 열정적이나 즉흥적으로 보여도 전부 다 철저히 계산된 것이였다.
  • 연설이 끝난 직후에는 자기가 한 연설을 분석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 1926년부터 당원들의 인서는 꼭 "Heil Hitler", 즉 히틀러 만세가 되었어야 됬다.

당의 구조

주로 행정구마다 나누어진 각 지역은 지역의 당담자가 있었고, 그 지역마저 극히 세분화 시켜서 아파트 단지의 관리자까지 임명하였고, 이 정책이 사회적 다윈주의식 성격을 띄는 매우 경쟁적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히틀러는 무자비하고 역동적인 리더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오히려 격려했다. 이러한 지역적인 구조 외에도 여러 작은 그룹들을 형성하였는데, HJ (Hitler's youth, 히틀러의 아이들), 여성을 위한 그룹인 Deutsche Frauenorden (DFO), NSDStB (NS Student's league)와 NSLB(NS Teacher's league) 등을 형성하였다.

불법 무장 단체

나치당은 Sturmabteilung (SA)라고 불리는 불법 무장 단체를 1921년부터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가지 수고스러운 일들을 맡아서 했는데 그 예시들로는:

  • 반대당의 집회에 들어가서 개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 구석 구석 돌아다니면서 당을 선전하는, 혹은 당에서 지시된 포스터를 붙이고 돌아다녔으며,
  • 선전물을 거리에 떠돌아다니며 배포하였다. 잠깐 나 이거 어디에서 아주 많이 본거 같아.

이런 일들을 도맡아 가면서 했으니 이들은 당연히 1930년에 나치당이 집권한 뒤에는 큰 보상을 원했으나, 히틀러가 주는 보상은 이들의 환상과 달랐고, 결국 별로 안좋은 결과를 얻어내고 만다.

목표 관중 확장

나치당은 기존 목표이던 근로자들 말고도 가장 불만이 많던 농부들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와중 나치들은 자신들의 정책 중 가장 논란에 휩싸였던 17번째 조항을 재해석하고, 세금 삭감을 약속하며, 농부들이 가장 싫어하던 공무원들의 월급을 삭감하고 싼 수입 품들을 줄이기로 약속'만' 하였다. 어라? 요즘 어느 나라 정치판이랑 비교해보니 변한게 하나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