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생애 ==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낙안군 남성면 금곡마을(현재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부친 나용집(羅龍集)과 모친 송씨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양반 가문의 자제로 어릴 때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1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한 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권지부정자직(權知副正字職)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권이 갈수록 쇠진해지고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관직 생활에 뜻을 잃어갔다. 그러던 1904년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재직하던 중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해 2월 말에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시키자, 그해 5월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나철은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꾀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에 의해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한국의 장래 문제가 이 회의에서 다뤄지라라 보고 한국의 입장을 미국 조야에 호소하고자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일본공사관이 이를 막자, 그는 1904년 6월에 유람을 명목으로 내세워 도쿄로 간 후 미국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미국행 비자가 나오지 않자, 그는 도쿄에 체류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등에게 서신을 보내 항의했다. 서신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양 평화를 위해 한, 중, 일 3국이 친선 동맹을 맺음으로서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천황에게 정의대도(正義大道)와 동양평화를 실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회신이 없자, 그는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하기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나철은 극도로 분노했다. 그는 매국노를 모두 죽여 국정을 바로잡겠다고 결심하고 칼 2자루를 행낭을 감추고 11월 30일에 귀국했다. 1906년 1월, 그는 오기호와 함께 [[을사오적]]을 일시에 처단할 것을 계획하고 김인식(金寅植) 등 동지들의 자금지원을 받아 이대하(李大夏)로 하여금 권총 8정을 구입하도록 했다. 또 이기, 윤주찬(尹柱瓚) 등에게 자작회(自作會)를 조직하여 취지서를 작성하였고, 자신은 헌간장(軒奸狀)과 동맹서(同盟書)를 작성했다. 그리고 윤주찬 등에게는 한국 정부와 일본에 보내는 공문과 내외국민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작성하게 하고,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으로 하여금 결사대를 조직하도록 했다. 1906년, 나철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통감부의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일본 대신들과 접촉해 을사조약을 폐기하고 통감부를 철폐하는 일에 관해 협조해 줄 것을 요청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상자를 구입해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지만 폭탄을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이후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먼저 음력 정월 초하루에 을사오적이 신년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할 때 처단하려 했지만 결사대원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 후 대원을 5개조로 나눠서 음력 2월 5일, 8일, 12일 3회에 걸쳐 암살을 시도했지만 대신들이 경호를 철저히 받고 있어서 모두 실패했다. 얼마 후 동지 서창보(徐彰輔)가 체포되어 고문을 못 이기고 모든 걸 발설하면서 오적 암살계획은 완전히 발각되었다. 그는 동지들이 차례로 체포되자 동지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평리원(平理院)에 출두했고 1907년 7월 3일 유배형 10년을 선고받고 지도(智島)로 보내졌다. 하지만 그해 12월 고종 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지도에서 풀려난 나철은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 통로를 통해 한국의 국권을 회복한느 방안을 모색했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이후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 동지들과 함께 한성부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한일병합]] 공표 한달 전인 1910년 7월 30일 나철은 칙령을 발표해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한다고 선포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했으며, 단군의 발자취를 찾아 성지 순례의 길을 나서 강화도와 평양을 거쳐 백두산 아래의 중국 화룡현 청파호에 이르렀다. 나철은 청파호에서 대종교의 확대 포교를 구상하고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한편으로는 교인과 교조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을 마련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일제는 대종교 신자가 급속도로 늘어나자 경계심을 품고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이로 인해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로 향했다. 8월 5일 황해도 사리원역에 도착한 그는 역앞 대기 사진관에서 제자 6명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음력 8월 6일 삼성사에 도착한 그는 8월 한가위에 동네 교인들과 함께 제례를 올린 뒤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렀다. {{인용문|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 나철은 제자들더러 삼성사의 문을 봉하게 한 뒤 그 안에서 여러 편의 유서를 남겼다. 그는 먼저 자신이 자결을 선택한 까닭을 밝히는 순명삼조(殉命三條)를 작성했다. {{인용문2|一. 철(喆)은 죄가 무겁고 덕이 엷어서 능히 한배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 겨례의 망케 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어 오늘의 업신여김을 받는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一. 철은 교를 받든지 여덟 해에 빌고 원하는 대로 한얼님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 번 입어서 장차 뭇사람을 구원할 듯 하더니 마침내 정성이 적어서 거룩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할지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한배검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一. 철이 이제 온 천하에 많은 동포가 가달진 길에서 괴로움에 떨어지는 이들의 죄를 대신 받으리라. 이에 한 올의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제자들에게 남기는 밀유(密諭)를 작성했다. {{인용문2|아! 우리 종문(倧門)에 뒤를 이은 이들은 항상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한울을 숭배하며 한얼님을 받들고 반드시 지극한 어짐과 사랑으로 사람을 건지고 세상을 구원하라. 이 교를 베풀어서 덕을 넓히고 업을 빛내며, 그 일의 처음을 좇아 벼리를 끌고 벼릿줄을 떨칠지어다. 마음을 놓아 신명(神明)을 속이지 말며, 기운에 지나쳐 선동하여 떠들지 말고, 빗나간 행동으로 정치에 간섭하지 말며, 망녕되이 움직여 법률에 범하지 말고, 겁냄과 원망을 품지 말며, 음탕함과 미혹함을 가까이 말고, 교문을 빙자하여 일을 저지르지 말며, 고우를 믿고, 세상 공론에 다투지 말고,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고, 권세 있다고 아첨하지 말며, 궁하고 가난한 이를 업신여기지 말라. 안정함으로써 그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뜻을 가지고 원도(願禱)로써 그 죄를 뉘우치며 근검으로써 살림을 불리고 자손에게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며 형제끼리 화목하게 사랑하고 정밀하게 안으로 어짐과 지혜를 닦으며 삼가 밖으로 믿음과 정의로 사귀고 두터운 정성을 일으킴엔 반드시 내 집에 일찍이 있는 여덟 가지 금함(팔관(八關))을 쓰며, 두터운 예절을 강구함엔 반드시 우리 도의 예부터 내려오던 아홉 가지 맹세(구서(九誓))를 쓰고 세 법(삼법(三法) :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을 힘써 행하여 먼저 욕심 물결의 고요히 쉼을 도모하며 한 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이 넓게 열림을 얻으라. 이와 같이 실천하면 한울이 반드시 복을 내릴 것이요, 만일 거슬려 어기면 한얼님이 반드시 재앙을 내리실 것이 조심하고 힘쓸지어다.}} 나철은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도 유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죽음은 나라와 겨례를 위함이며 대종교는 한 나라를 넘어 세계를 위힘이니 탄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인용문2|아기(딸)에게 유서 안집 열네해 동안 니 얼굴을 못보고 오늘 천고영별은 니 맘에 맺힌 한이 있을 듯하고 내 눈에 항상 걸릴듯하나 기 길은 곧 영생하는 하늘길이니 부디 애희를 두지 말고 아비를 생각거든 대종교 큰 도를 정성으로 믿고 아비를 만나려거든 공부를 통하여 하늘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 잊지 말라. 친부자필.}} {{인용문2|정경, 정문, 정채, 정강, 정기 다섯 아해에게 너 아비의 돌아감은 한울에 순함이니 서러워하지 마라. 내가 이미 수십 년을 밖에 있어서 이제 너희들로 하여금 개천구령에 빠지게 하니 실로 너 아비의 덕이 없음이라. 너의 무리 가운데 혹시 내 뜻을 이어서 몸을 종문에 바치는 자가 있으면 참으로 내 아들이다 누가 할 수 있을까! 초상 장사 제사의 세 가지를 아래에 적으니 너희들은 경계하야 행할지어다. 一. 초상에는 머리를 푸지 말며 울음을 울지 말며 염함에 명주 비단을 쓰지 말며 다만 삼베 무명으로 하고 아침 저녁의 곡을 폐할 것. 一. 장사에는 시체를 짜는 데 관곽을 쓰지 말며 다만 부들자리로 하고 꽃상여 등 엣 제도를 쓰지 말며 명정에는 다만 성명 두 자만 쓰고 화장하여 깨끗함을 얻게 하고 궤연, 제복, 방립, 상장직령, 조석전, 시묘 등 옛 제도를 폐하며 다만 삼백예순여섯날로써 복을 벗고 기공 등은 이에 따라서 감할 것 一. 제사에는 기일에 고기, 술들을 쓰지 말며 다만 한 그릇 밥과 한 가지 반찬으로 하고 신주를 만들지 말며 소리내어 울지 말 것. 한님이 나리신지 사천삼백일흔세해 병진 팔월 보름날에 아비가 아사달메에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 {{인용문2|사위에게 남김. 사랑하는 사위 안종익 호는 백호 나는 너를 아주 사랑하고 너도 나를 믿었다. 내가 도의 두자로 너를 면려하엿는데 너는 과연 그것을 믿고 모름지기 힘을 썼구나. 지금 한 올 목숨을 절단하면서 바라건데, 중생의 죄를 대신하여 종도를 천하에 베풀 것을 기다린다. 또 죽고 사는 것은 몸껍질에 있지 아니하고 신의는 오직 신명을 맑게 하는 것이니, 너는 능히 대도를 수련하여 천리에 도달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죽음에 임하여 세상을 잊을 수 없어서 한 말을 남긴다. 단제 강세 4373년 병진 중추절에 늙은이 홍암 친서.}} 음력 8월 16일 새벽 제자들이 인기척이 느끼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겨 문을 뜯고 들어가보니 나철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한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