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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나월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전원을 이끌고 한국 광복군에 합세했다. 그들은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편성되었고 간부와 대원 200여 명이 이 부대에 배치되었다. 제5지대장에 임명된 나월환은 대원들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나월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전원을 이끌고 한국 광복군에 합세했다. 그들은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편성되었고 간부와 대원 200여 명이 이 부대에 배치되었다. 제5지대장에 임명된 나월환은 대원들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 ||
{{인용문|[[ | {{인용문|[[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방략에 위배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한국광복군 공약을 준수하며, 한국광복군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직무에 충실하여 조국광복운동에 지성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헌신하기를 자에 선서합니다.}} | ||
이렇게 해서 광복군 5지대로 편입된 청년전지공작대는 징모처 5분처가 되었다. 제5분처는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전개해온 활동을 그대로 계승해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제5지대는 이를 기반으로 초기에 편성된 4개 지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서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발전했다. 사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하기 이전 광복군의 병력 숫자는 고작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전지공작대 200 명이 합세하면서 군대 편제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었다. | 이렇게 해서 광복군 5지대로 편입된 청년전지공작대는 징모처 5분처가 되었다. 제5분처는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전개해온 활동을 그대로 계승해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제5지대는 이를 기반으로 초기에 편성된 4개 지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서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발전했다. 사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하기 이전 광복군의 병력 숫자는 고작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전지공작대 200 명이 합세하면서 군대 편제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