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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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주목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그나마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주목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그나마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코스모 석유 당시 김병수의 포지션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프리롤인 듯?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한다."포지션이 없었죠. 그냥 공격이었어요."}}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일왕배 경기에 출전한 적이 있는데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었다. 여담으로 이 당시 유고슬라비아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인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나고야에서 뛰고 있었는데 이 팀을 이긴 것이다. <s>세계적인 선수를 발라버린 한국 축구 천재의 위엄</s> 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히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김병수 입장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스모 석유 당시 김병수의 포지션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프리롤인 듯?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한다."포지션이 없었죠. 그냥 공격이었어요."}}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일왕배 경기에 출전한 적이 있는데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었다. 여담으로 이 당시 유고슬라비아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인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나고야에서 뛰고 있었는데 이 팀을 이긴 것이다. ~~세계적인 선수를 발라버린 한국 축구 천재의 위엄~~ 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히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김병수 입장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돌았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인의 주선으로 [[오이타 트리니타]]를 입단했고,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하기에 이른다. '비운의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을 만큼 안타까운 은퇴였다.{{*|당시 오이타 트리니타에 한국 선수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언급한다.}}
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돌았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인의 주선으로 [[오이타 트리니타]]를 입단했고,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하기에 이른다. '비운의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을 만큼 안타까운 은퇴였다.{{*|당시 오이타 트리니타에 한국 선수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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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이었다. 김병수는 포철공고의 코치를 맡게 된다. 이후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 {{*|페어 플레이를 강조하고 절대로 거친 반칙을 못하게 했다.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다고 선수들에게 역설했다.}}
고려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98년 11월이었다. 김병수는 포철공고의 코치를 맡게 된다. 이후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 {{*|페어 플레이를 강조하고 절대로 거친 반칙을 못하게 했다. 스포츠맨쉽이 제일 중요한다고 선수들에게 역설했다.}}


포철공고의 포메이션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팀과 유사한 형태의 3-5-2. 중앙 수비수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고 다시 그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는 다이아몬드형 시스템이다. 그런데, 한 가지 독특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 보기 힘든 컴팩트 사커를 구사한다는 것. 전후방은 물론 좌우 측면의 간격도 극단적으로 좁히는 압박 전술이다. 스리백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더블 블란치로 세우고 때때로 4-4-2 나 3-4-3으로 급격한 전술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지 않아 어설픈 면도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다. {{*|신선한 전술인 만큼 선수들의 이해도가 낮았지만, 그 당시에는 폭력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병수는 선수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주로 나타나는, 자신의 능력을 기준으로 잡고 선수들을 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수들을 낮은 곳에서부터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선수들의 공부를 강조했다. 이론을 중요시해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금방 선수들이 이해한다고. <s>심지어 한글도 잘 못 쓰는 선수들이 많다고...</s>
포철공고의 포메이션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팀과 유사한 형태의 3-5-2. 중앙 수비수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고 다시 그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는 다이아몬드형 시스템이다. 그런데, 한 가지 독특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 보기 힘든 컴팩트 사커를 구사한다는 것. 전후방은 물론 좌우 측면의 간격도 극단적으로 좁히는 압박 전술이다. 스리백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더블 블란치로 세우고 때때로 4-4-2 나 3-4-3으로 급격한 전술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지 않아 어설픈 면도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다. {{*|신선한 전술인 만큼 선수들의 이해도가 낮았지만, 그 당시에는 폭력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병수는 선수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주로 나타나는, 자신의 능력을 기준으로 잡고 선수들을 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수들을 낮은 곳에서부터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선수들의 공부를 강조했다. 이론을 중요시해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금방 선수들이 이해한다고. ~~심지어 한글도 잘 못 쓰는 선수들이 많다고...~~


이후 2008년 [[영남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당시 영남대의 축구부 상황은 아주 안 좋은 상태였다. 축구를 쉬었던 선수들이 대부분이고 선수들 자체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의 부임 이후 영남대는 [[포항 스틸러스]]의 2군에 가까운 팀으로 거듭났으며, 그 패스 축구를 그대로 영남대에 이식시켰다. 그 결과물이 2013년 U리그 우승과 2014년 FA컵 16강. [[손준호]]의 말에 따르면 패스의 숫자로만 따지면 포항보다 영남대 시절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선수들의 패스 플레이를 훈련시킨다. 영남대 감독으로서 배출한 선수들이 자리잡아가기 시작한 시기라 유명한 선수가 많지 않지만, 2012~5년 K리그로나 국가대표팀으로나 가장 핫한 선수중에 하나인 [[이명주]]와 [[김승대]]가 그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특히 이명주의 경우, 원래 센터백이였으나, 수비수에 비해 공을 잘 다뤄 미드필더로 전향시켰고 이것은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들보다 먼저 프로로 나선 선수가 [[신진호]]이다. 신진호는 처음에는 임대를 다녔지만, 결국 그 게임메이킹 능력을 만개했다.
이후 2008년 [[영남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당시 영남대의 축구부 상황은 아주 안 좋은 상태였다. 축구를 쉬었던 선수들이 대부분이고 선수들 자체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의 부임 이후 영남대는 [[포항 스틸러스]]의 2군에 가까운 팀으로 거듭났으며, 그 패스 축구를 그대로 영남대에 이식시켰다. 그 결과물이 2013년 U리그 우승과 2014년 FA컵 16강. [[손준호]]의 말에 따르면 패스의 숫자로만 따지면 포항보다 영남대 시절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선수들의 패스 플레이를 훈련시킨다. 영남대 감독으로서 배출한 선수들이 자리잡아가기 시작한 시기라 유명한 선수가 많지 않지만, 2012~5년 K리그로나 국가대표팀으로나 가장 핫한 선수중에 하나인 [[이명주]]와 [[김승대]]가 그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특히 이명주의 경우, 원래 센터백이였으나, 수비수에 비해 공을 잘 다뤄 미드필더로 전향시켰고 이것은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들보다 먼저 프로로 나선 선수가 [[신진호]]이다. 신진호는 처음에는 임대를 다녔지만, 결국 그 게임메이킹 능력을 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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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의 만남 ===
=== 아내와의 만남 ===
김병수가 다니던 헬스클럽이 있었는데 헬스클럽 관장이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관장님의 딸. 그런데,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났다. 김병수를 만났을 때 부인 허은영씨는 고등학생<s>[[대도]]가 [[노병준|요기에도]] [[제난 라돈치치|있네]]?</s>이었다. 어린 딸을 믿고 맡긴 장인도 대단한 분이지만 겁(?)도없이 시커먼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은영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김병수 감독은 그의 어두움을 걷어낼 한줄기 빛같은 여인을 만났다고. {{*|학교 앞에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바래다줬다고 한다. 밝고 착하고 건강한 면에서 끌렸다고 한다.}} 부인 허은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을 못채우고 김병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남편이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들 '다훈'과 딸 '사이'가 태어났다. 당시 훈련 부담이 적다보니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많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김병수가 다니던 헬스클럽이 있었는데 헬스클럽 관장이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관장님의 딸. 그런데,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났다. 김병수를 만났을 때 부인 허은영씨는 고등학생~~[[대도]]가 [[노병준|요기에도]] [[제난 라돈치치|있네]]?~~이었다. 어린 딸을 믿고 맡긴 장인도 대단한 분이지만 겁(?)도없이 시커먼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은영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김병수 감독은 그의 어두움을 걷어낼 한줄기 빛같은 여인을 만났다고. {{*|학교 앞에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바래다줬다고 한다. 밝고 착하고 건강한 면에서 끌렸다고 한다.}} 부인 허은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을 못채우고 김병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남편이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들 '다훈'과 딸 '사이'가 태어났다. 당시 훈련 부담이 적다보니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많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필름으로 보관된 그의 경기 장면은 많지 않다. 다행히 아들 다훈군에게 보여주려고 그가 몇 장면 녹화한 것이 있다고 한다.
필름으로 보관된 그의 경기 장면은 많지 않다. 다행히 아들 다훈군에게 보여주려고 그가 몇 장면 녹화한 것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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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현대 축구의 공격 시발점은 어느 팀이든 최후방의 수비 라인이 되고 있다. 이는 예전처럼 중반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갈수록 급박한 긴장감에 의해 현대 축구는 변모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s>그리고 [[신진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를 길러냈다.</s>
앞으로는 더욱 더 빨라질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마라톤 기록이 깨어지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축구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개인기술의 향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진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를 길러냈다.~~


=== 2군 리그에 대한 생각 ===
=== 2군 리그에 대한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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