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초년기 === 1881년 음력 1월 27일(양력 2월 28일) 경상도 동래부(현재 부산광역시)에서 청풍 김씨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지성은 [[강화도 조약]] 직후 동래부의 외무 관리로 근무했으며,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으로 들여오는 등 개화를 추구하는 인사였다. 그는 동래부 관리로 재직중인 1885년경 일본 상인들의 횡포가 늘어나자 불평등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길에 올랐다. 게다가 모친 경주 이씨 마저 급병에 걸려 죽으면서, 김규식은 6살에 고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 한성부에 살던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지만, 큰아버지 역시 생업이 어려워서 그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1886년 5월 조선에 고아학교를 처음으로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사정을 전해듣고 1887년 김규식을 고아학교에 데려갔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는 김규식이 고아학교에 들어간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인용문2|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하였다.}} 김규식은 고아학교에서 점차 건강을 되찾았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남달리 총명했기에 언더우드 부부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이에 주변인들은 그가 언더우드 부부의 양자라고 오해했다고 한다. 한편 고아학교 원생 시절 그의 별칭은 '번개비'였는데, 이로 볼 때 체구는 작았지만 매사에 민첩하고 재기가 넘친것으로 추정된다. 영문으로는 '존'(John)이라 불렸다고 한다. 고아학교는 시간이 지나며 원생이 늘어나자 규모를 학당으로 확장시키고 언더우드의 이름을 따 원두우학당이라 불렀다. 이 학당은 1894년 학당 책임을 선교사 밀러가 맡으면서 민노아학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청일전쟁]] 때 [[안창호]]가 밀러 선교사의 초빙을 받아 민노아학당의 학생 겸 접장 노릇을 2년간 했는데, 김규식은 이때 안창호와 처음 대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규식은 고아학교 및 학당에서 10여년 간 언더우드와 함께 생활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접했고, 영어 공부와 한문 및 서양의 자연과학 등 다양한 근대학문을 익혔다. 하지만 김규식이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은 건 미국으로 유학한 후인 1898년이었다. 그가 뒤늦게야 세례를 받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불우한 처지로 인해 불신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김규식이 고아원과 학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용문2|비록 언더우드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고아의 처지가 된 어린 규식이 행복할 리 없었다. 19세기 말엽이라면 아직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서 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가지 심리적 억압과 고통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략) 그리고 사회신분을 중시한 사회에서 고아원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어린아이들 간에도 많은 경멸과 천대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다. (중략) 우사는 때때로 고아원을 뛰쳐나와 잃은 부친을 찾는다고 서울 시내를 헤매곤 하였다는데, 이는 물론 부친을 흠모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나 심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1974.}} 17세 때인 1897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김규식은 가을학기부터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했다. 그가 누구의 도움과 알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언더우드의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으나, 1890년대 후반 이래 김규식과 언더우드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증언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갑신정변]] 이후 미국에 망명했다가 1896년 귀국하여 젊은이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장했던 [[서재필]]의 도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로녹대학에 입학한 그는 무척 성실하게 공부했다. 이는 그의 성적표에서 드러난다. 1897년 가을학기 수강한 예과 과목 성적을 보면, 영어 88점, 초급라틴어 94점, 역사 87점, 영독 94점, 수학 88점, 상업수학 80점, 영작 89점으로 기록되었다. 1898년 봄 학기 성적은 더욱 우수하여 영어 92점, 라틴어 91점과 96점, 역사 94점, 수학 97.7점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이같은 우수한 성적으로 더이상 예과 과정이 필요없다고 인정받아 1898년 가을 학기부터 본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규식은 유학 생활 3년째 되던 해부터 미국인 학생들과 폭넓게 교제했다. 학내 웅변클럽인 데모스테니언 문학회에 가입하여 미국 및 세계정치 문제 토론에 참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써클 회원으로 참가한지 1년도 안된 1898년에 써클의 통신서기가 되었고, 1900년 1월에는 기록서기, 1900년 11월에는 부회장을 맡았고, 1902년 1월에 회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1900년 6월에 개최한 강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고, 1901년 5월에 개최된 전교강연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는 등 연설가, 웅변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기고가,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대학에서 출간되는 <로녹 컬리지언>에 '한국어', '동방의 서광'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한국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한편, 한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 특히 '동방의 서광'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인용문2|서양에서는 근대문명이 꽃피고 있는 반면에 동쪽은 암흑의 밤이 깊이 들어 있다. 동양의 거목들은 한때 은빛의 이슬로 빛났으나, 지금은 겨울의 깊은 눈에 싸여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다. 그러나 깊은 밤은 곧 지나갈 것이고, 한국에도 서광이 비칠 것이니, 도둑들은 물러갈 것이고, 나라의 부를 약탈하는 무리들이 없어질 것이며, 필경은 외국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1903년 5월 <로녹 컬리지언>에 기고한 '러시아와 한국문제'에서, 김규식은 머지않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러시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용문2|러시아는 1억 2천 9백만의 건장하고, 왕성하고, 거칠고,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야만적이기까지 한 인구로부터 선발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상비군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아주 영민한 정치가들과 예리한 외교관들로 구성되어, 충성하는 신민을 보호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종족들을 통제하며, 국제분쟁에서는 종종 경쟁국가들을 속여넘긴다.}} 이에 반해 한국의 사정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서술했다. {{인용문2|한국은 3천 6백년 전에 역사가 시작됐음에도 현재까지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이다. 위대한 이웃인 중국으로부터 문명을 수용한 이래로, 한국은 학문의 전당이었으며, 용맹한 무인의 고향이었다. 공자의 철학과 석가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한 조상숭배라는 유력한 종교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옛 어른들을 능가함은 잘못이라는 생각과 선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은 후에는 그를 능가하는 인물은 다시는 출현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국의 발전이 왜 더딘지를 쉽게 알 수 있다. 3천년 동안, 즉 여러 왕조의 통치기간동안 한국은 독립국이었으나, 15세기 초 남쪽의 이웃나라와 동맹의 필요성을 느꼈고 어린애같이 보호를 청하였다. 그 결과 1866년까지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 이웃나라인 남쪽의 중국과 북쪽의 러시아와 비교할 때, 한국은 지도상의 한 반점에 불과하고, 9만 2천 평방마일 면적의 반도이며, 현재 타락하고, 무분별하며, 불성실한 정부의 절대통치를 받는 비활동적이고 비진취적인 1천 5백만의 주민을 가지고 있다. 지난 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외국과 교섭을 거부했으므로 '은자의 나라'라고 불렸다.}} 한편 일본과 중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용문2|일본은 최근 적극적이며 대국의 대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단지 48년 전 미국 해군의 페리 제독이 그 자물쇠를 부숨으로써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본은 강한 해군과 육군을 가진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읿론은 그 주변 지역에 러시아의 침투를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중국은 동아시아와 그 문명의 모태임을 자랑하지만, 한국처럼 국가 쇠망의 길에 빠져 있고 국토를 외국의 전쟁터로 내어주고 있으며, 자신을 세계인의 탐욕을 위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는 한국의 운명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달렸다고 규정했으며, 한국은 결국 일본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하면서, 그 이유는 "러시아는 한국을 단지 원할 뿐이지만,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잉여인구와 에너지의 배출구로 삼는 등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러시아보다는 일본에게 넘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인용문2|한국 사람은 일본에 속하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러시아에 속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한국인은 결국에는 둘 중 어느 한 나라에 속할 것이므로 이 불쌍하고 불운한 민족이 소위 독립국이라는 현재의 정부 체제 아래서 신음하며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있는 한 진보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마지막 날까지 러시아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역을 강요당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비호 아래에서는 한국인들은 비록 소유물과 권리를 빼앗기지만 입고, 먹고, 교육받고, 평온하게 제국의 훌륭한 신민이 될 것이다. 만약불행한 한국이 이제라도 각성한다면, 박두한 압제를 곧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한국을 기꺼이 이웃으로 대할 것이다.}} 1903년 6월 로녹대학을 우수한 성적<ref>6년간 평균 성적이 92.16점이었다.</ref>으로 졸업한 김규식은 1년 남짓 뉴욕에서 생활하다가 23세 때인 1904년 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던 외국 상사(商社), 광산회사, 은행 등에서 많은 급료를 주겠다는 교섭이 쇄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를 뿌리치고 언더우드의 비서가 되었고, 새문안교회의 집사, 장로로 봉사했다. 그러면서 [[러일전쟁]]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1905년 1월 미국이 양국의 강화회담을 포츠머스에서 중재해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에 갔다. 그러나 이미 강화회의가 끝나 뜻을 펴지 못하자 귀국했다. 이후 미국에 다시 유학하려 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아 실패했다. 그후 언더우드를 도와 새문안교회의 신자들에게 설교하는 한편, [[YMCA]]의 학생부 간사를 역임했으며, 경신학교 등 몇몇 학교와 교사와 강사를 맡았으며, 계몽 강연활동에 진력했다. 그러던 1906년 5월 21일 새문안교회 교인이며 군수를 지낸 조순환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정신여학교 합창대의 축가 속에 새문안교회에서 거행되었는데, 서양식 결혼식이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혼례식, 즉 사모관대 차림에 족두리를 쓰고 연지, 곤지 찍은 혼례로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새문안교회 봉사와 교육, 계몽 강연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새문안교회 재직회록과 당회록, 그리고 교우 세례문답록에는 그의 활동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이 기록들은 현재 새문안교회 내 교회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1906년 이후, 김규식은 동서문밖 홍천사 옆에 설립된 홍화학교와 총교사를 시작으로 교육활동에 적극 나섰다. 또한 당시 대표적인 구국단체였던 대한자강회의 교육부위원을 맡았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7일 잡보는 김규식을 "교육계에 새로운 바람과 영향을 미친 양사(良師)의 표준"이라고 찬양했다. 이밖에도 남대문 내 광신사(廣信社)에서 상업전문학교(商業專門學校)에 청빙되었다. 한편 YMCA에서 1907년 2월부터 1908년 3월 사이에 4회에 걸쳐 강연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7월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영국인 집사 출신으로 당시 일본 고베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C.N. 크로스가 증인으로 출석했는데, 김규식이 통역을 맡았다. 김규식의 통역은 완벽했고, 이를 토대로 두 사람의 혐의가 아무 근거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밖에도 당시 국내에 설립되었던 한미홍업주식회사에 이범주(李範周), 임병환(林炳桓), 홍성근(洪聖根) 등과 함께 주주로 참여하는 등 기업활동에도 관여했고, '소년회'라는 단체를 발기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