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 당신의 편집 | ||
29번째 줄: | 29번째 줄: | ||
{{인용문|3월 3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하고 동지 지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남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 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 {{인용문|3월 3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하고 동지 지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남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 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 ||
김경천과 지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두 사람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한편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 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 | 김경천과 지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두 사람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한편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 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등 동지들을 후원하고자 노력했다. | ||
또한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1881년)|안병찬]] 외 28명 중 한 사람으로서 '중화민국 관상보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에서 일본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침략을 전개할 것이며, 만일 국제연맹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곧 독립전쟁을 선포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혈전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했다. | 또한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1881년)|안병찬]] 외 28명 중 한 사람으로서 '중화민국 관상보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에서 일본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침략을 전개할 것이며, 만일 국제연맹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곧 독립전쟁을 선포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혈전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