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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과 지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두 사람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한편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 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 동지들을 후원하고자 노력했다. | 김경천과 지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두 사람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한편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 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 동지들을 후원하고자 노력했다. | ||
또한 1919년 8월에는 [[ | 또한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 중 한 사람으로서 '중화민국 관상보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에서 일본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침략을 전개할 것이며, 만일 국제연맹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곧 독립전쟁을 선포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혈전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했다. | ||
그러나 김경천의 대한독립단에서의 활동은 그해 8월 총재 안병찬이 체포되면서 대한독립단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지청천]], [[신팔균]]과 함께 교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東天) 신팔균, 경천(擎天) 김광서(金光瑞). 청천(靑天) 지석규(池錫奎)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남만 삼천(南滿 三天)이라고 불렀다. | 그러나 김경천의 대한독립단에서의 활동은 그해 8월 총재 안병찬이 체포되면서 대한독립단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지청천]], [[신팔균]]과 함께 교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東天) 신팔균, 경천(擎天) 김광서(金光瑞). 청천(靑天) 지석규(池錫奎)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남만 삼천(南滿 三天)이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