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드라마)

  • 방송 시간: 월, 화요일 오후 10시
  • 방송 기간: 2013년 10월 28일- 2014년 4월 29일
  • 극본: 장영철

주요 인물들[편집 | 원본 편집]

기승냥을 돕는 사람들[편집 | 원본 편집]

기승냥과 맞선 적들[편집 | 원본 편집]

기승냥의 라이벌들[편집 | 원본 편집]

기황후로 인해 생겨난 오해[편집 | 원본 편집]

기황후는 무지한 작가와 PD의 상상력만으로 만든 드라마라는 평을 받음과 동시에 한몽 관계에 부적절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란이 일었다. 아래의 기사를 쓴 김운대 교수는 비록 환빠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몽골에 관해 탈민족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오해: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의 삶은 가혹하고 참담했다. 궁중의 시녀가 되거나 고관대작의 첩실이 되는가 하면, 유곽에 팔려나가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 땅에 끌려간 제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

반박: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더라면 이딴 드라마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공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사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충렬왕 때 몰려 있고, 고려 원종 15년 3월부터 공민왕 5년까지 전체 82년간 원나라로 간 여인들의 수는 800여 명 미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식적으로 나온 수는 713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274년에서 1276년까지 3년간 전체의 91%가 공녀로 갔으며 이후 80여 년간은 매년 거의 1∼2명의 수준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그리는 시기는 충혜왕의 시기인데 이 당시는 공녀가 거의 없는 수준으로 그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였다.

1년에 1∼2명이 고관대작들의 요청으로 공녀로 가는 것이 드라마의 작가나 PD가 말하는 것처럼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 땅에 끌려간 제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라고 비분강개한다면, 이들이 아는 역사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공녀는 고려와 갈등이 많았던 초기에 일종의 전리(戰利)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