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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는 미국 본토에서 학업에 전념하는 형제들에 비해 정규교육을 이수하지 않고 국민회 등 교민단체 활동에 전념했고, 그 대신 독학으로 상당한 학식을 획득했다. 이무렵 [[안창호]]를 만난 강영소는 그의 협력자로 자처했고 1913년 5월 13일 자신의 셋집인 샌프란시스코 페리 가에서 안창호가 주최한 [[흥사단]] 창립식을 개최하게 했다. 흥사단은 민족 부흥을 위해 민족의 힘을 양성할 것을 강조하고 민족 구성원 개개인이 무실, 역행, 충의, 용감에 힘쓸 것을 주장하면서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조직된 단체였다. 흥사단 발기인회 주무는 정원도였지만, 마침 그는 자리를 떠나 있었기에 강영소가 대리를 맡아 처리했다. | 강영소는 미국 본토에서 학업에 전념하는 형제들에 비해 정규교육을 이수하지 않고 국민회 등 교민단체 활동에 전념했고, 그 대신 독학으로 상당한 학식을 획득했다. 이무렵 [[안창호]]를 만난 강영소는 그의 협력자로 자처했고 1913년 5월 13일 자신의 셋집인 샌프란시스코 페리 가에서 안창호가 주최한 [[흥사단]] 창립식을 개최하게 했다. 흥사단은 민족 부흥을 위해 민족의 힘을 양성할 것을 강조하고 민족 구성원 개개인이 무실, 역행, 충의, 용감에 힘쓸 것을 주장하면서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조직된 단체였다. 흥사단 발기인회 주무는 정원도였지만, 마침 그는 자리를 떠나 있었기에 강영소가 대리를 맡아 처리했다. | ||
이어 1913년 12월 창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강영소는 흥사단 단우번호 2번으로 참여했고 평안도를 대표하는 창립인사로 알려졌다. 이후 그의 형제들도 뒤따라 흥사단에 참여했는데, 특히 강영대는 22번 단우로서 창립 초기부터 전권기초위원과 이사부원으로 활동했다. 강영소는 1914년 2월 대한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총회장 [[ | 이어 1913년 12월 창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강영소는 흥사단 단우번호 2번으로 참여했고 평안도를 대표하는 창립인사로 알려졌다. 이후 그의 형제들도 뒤따라 흥사단에 참여했는데, 특히 강영대는 22번 단우로서 창립 초기부터 전권기초위원과 이사부원으로 활동했다. 강영소는 1914년 2월 대한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총회장 [[이대위]]를 보좌하며 북미지방총회를 이끌었다. 훗날 경기도 창립위원장 [[홍언]]은 강영소가 별세한 뒤 그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
{{인용문|사람이 다 말하기를 강영소는 미주, 하와이 국민회에 공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공이 있다면 자기 할 일 하고 간 것 뿐이라. 그런고로 가만 그의 성품을 생각하나니, 그는 공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아울러 사무처리에 능숙하여 동료들이 다 신뢰하였고, 또 천성이 온유, 겸손하여 일찍이 동료와 충돌한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장점이며 내가 그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 {{인용문|사람이 다 말하기를 강영소는 미주, 하와이 국민회에 공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공이 있다면 자기 할 일 하고 간 것 뿐이라. 그런고로 가만 그의 성품을 생각하나니, 그는 공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아울러 사무처리에 능숙하여 동료들이 다 신뢰하였고, 또 천성이 온유, 겸손하여 일찍이 동료와 충돌한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장점이며 내가 그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