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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 배경 == | ||
=== 개화파의 성장 === | === 개화파의 성장 === | ||
1876년 2월 2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 내에서 서구의 앞선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날로 증대했다. [[대한제국 | 1876년 2월 2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 내에서 서구의 앞선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날로 증대했다. [[고종 (대한제국)|고종]] 역시 개화 정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국가의 재정, 군사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의 수장인 총리대신은 영의정, 좌의정 등을 임명하였으나 명목상의 직책에 불과했고, 실제로 운영을 주도한 이들은 7사의 당상들이었다. 이들은 설립 초기에는 고종의 근위세력 및 민씨 척족들이 등용되었지만<ref>[[민영익]], [[민태호]], [[민겸호]], [[민치상]] 같은 이들이 7사의 주요 당상에 포진했다.</ref>, 1881년 11월 이후에는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홍영식]], [[이헌영]], [[민종목]] 등이 당상직을 맡았다. | ||
통리기무아문은 군사제도를 개편했다.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정어영의 2영으로 개편했으며,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외에도 무역에서 주로 쓰이는 특산물을 관리해 재정확보책을 강구하였고, 일본과 청국에 조사시찰단과 영선사를 파견했다. 이러한 개화정책 추진은 개화파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지배세력으로서 500년간 군림했던 유학자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해 개화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고, 일본에 쌀이 유출되는 것에 반감을 품은 백성들도 개화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구식군인 취급 받으면서 봉급도 오래도록 받지 못하던 기존의 5군영 군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그 결과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민씨 척족은 대거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통리기무아문을 철폐하고 개화 정책을 모두 폐기했다. | 통리기무아문은 군사제도를 개편했다.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정어영의 2영으로 개편했으며,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외에도 무역에서 주로 쓰이는 특산물을 관리해 재정확보책을 강구하였고, 일본과 청국에 조사시찰단과 영선사를 파견했다. 이러한 개화정책 추진은 개화파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지배세력으로서 500년간 군림했던 유학자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해 개화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고, 일본에 쌀이 유출되는 것에 반감을 품은 백성들도 개화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구식군인 취급 받으면서 봉급도 오래도록 받지 못하던 기존의 5군영 군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그 결과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민씨 척족은 대거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통리기무아문을 철폐하고 개화 정책을 모두 폐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