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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은 조정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던 개화 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유학자들에게 있어 개화는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윤치호는 일기에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자는 사람들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 그나마 김홍집, 어윤중을 필두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조정에 남아서 근대적 개혁을 조심스럽게 추진했지만, 그 속도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본격적인 개혁은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시행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일본의 간섭 떄문에 불완전했다. | 갑신정변은 조정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던 개화 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유학자들에게 있어 개화는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윤치호는 일기에 .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자는 사람들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 그나마 김홍집, 어윤중을 필두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조정에 남아서 근대적 개혁을 조심스럽게 추진했지만, 그 속도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본격적인 개혁은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시행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일본의 간섭 떄문에 불완전했다. | ||
고종은 일본이 갑신정변에 연루된 것을 파악하고 일본 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 동안 조선 민중의 습격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살해되었으니 사과와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가 "너희가 도망치면서 공사관 건물을 스스로 방화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반역자들을 비호하고 있으니 협상할 가치가 없다"며 거부하자,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가오루를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2개의 대대병력과 7척의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압박했다. 결국 조선 정부는 굴복하여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 지불과 일본인을 살해한 폭도 처벌, 사죄단 파견을 약속했다. | 고종은 일본이 갑신정변에 연루된 것을 파악하고 일본 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 동안 조선 민중의 습격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살해되었으니 사과와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가 "너희가 도망치면서 공사관 건물을 스스로 방화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반역자들을 비호하고 있으니 협상할 가치가 없다"며 거부하자,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가오루를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2개의 대대병력과 7척의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압박했다. 결국 조선 정부는 굴복하여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 지불과 일본인을 살해한 폭도 처벌, 사죄단 파견을 약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