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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이러한 양측의 대립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적절히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 유지하고자 했다. 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한 친청파를 중용하는 동시에 왕권 행사에 걸림돌이 되는 청의 외압을 걷어내기 위해 미국, 일본 등의 힘을 빌리고자 했고, 이를 위해 급진개화파를 또 다른 정치세력으로 키웠다. 그래서 친청파와 민씨 척족의 집요한 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옥균 등을 계속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여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급진개화파는 그런 고종을 "주저하고 의심이 많아 잠시의 편안함만을 얻으려 하고"<ref>윤치호 일기 1883년 12월 21일자 기록</ref>, 매사를 스스로 결단하지 못한다"고 여겼다.<ref>윤치호 일기 1884년 1월 23일자 기록</ref> 그들은 고종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고 여기고,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여겼다. | 고종은 이러한 양측의 대립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적절히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 유지하고자 했다. 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한 친청파를 중용하는 동시에 왕권 행사에 걸림돌이 되는 청의 외압을 걷어내기 위해 미국, 일본 등의 힘을 빌리고자 했고, 이를 위해 급진개화파를 또 다른 정치세력으로 키웠다. 그래서 친청파와 민씨 척족의 집요한 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옥균 등을 계속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여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급진개화파는 그런 고종을 "주저하고 의심이 많아 잠시의 편안함만을 얻으려 하고"<ref>윤치호 일기 1883년 12월 21일자 기록</ref>, 매사를 스스로 결단하지 못한다"고 여겼다.<ref>윤치호 일기 1884년 1월 23일자 기록</ref> 그들은 고종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고 여기고,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여겼다. | ||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정변 당시 |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정변 당시 20대~30대의 젊은이였다. 그들은 나이대에 비해 고위직을 꿰차고 있었으며, 고종의 신임도 두둑히 받았다. 제도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기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민씨 척족의 저항도 강했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여가며 동지규합에 힘써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면, 언젠가 조선의 정책 전반을 도맡았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이 일본처럼 하루빨리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혔고, 청군이 횡포를 부리고 청나라 인사들이 고종에게 불손하게 대하는 것에 분개한 나머지 입지를 천천히 다지기보다는 단숨에 정치판을 뒤집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결국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접촉하여 정변을 준비한다. | ||
== 정변을 주도한 인사들 == | == 정변을 주도한 인사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