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응언

채응언(蔡應彦)은 한반도 내 중북부에서 의병 활동을 한 의병장이다. 의병 항쟁의 말미인 1915년까지 활동한 인물로 마지막 의병장이라고 불린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채응언은 주로 북한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다가 의병에 언제 투신하여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이름 또한 채응언(蔡應彦), 채응원(蔡應元), 채응경(蔡應慶), 채도석(蔡道錫) 등으로 불분명한 편이지만 <채응언판결문>과 그가 남긴 격문에 따르면 채응언(蔡應彦)이라는 이름이 정확하다고 나와있기 때문에 따라서 채응언이 정확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년월일도 불분명하다. 국가보훈부의 각종 자료에서는 1879년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홍영기의 <蔡應彦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논문에서는 1883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1883(고종 20)에 출생한 것으로 밝혀져서 아직도 그의 출생이 불분명하다고 볼 수 있지만 거의 1883년에 출생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출생지는 기록마다 상당히 다르게 나타나지만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채응언 의병장에 관한 한 논문에서 추측하기를 평남 성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황해도 곡산군 미야골로 이사했다고 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했다고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농사를 짓고 살던 건장한 청년으로 추정되고 빈농으로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지닌 빈농들을 대변하다가 황해도 곡산으로 이주해 화전농을 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농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협적 농민'이라는 설을 가지고 있다.

의병 활동[편집 | 원본 편집]

채응언이 태어나고 유소년으로서 자라던 시기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유행이었고 한반도를 대상으로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이 진행되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국민들이 살기 어려웠다. 그는 가난한 농민으로 자라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그에 관한 역사적 사료에 따르면 강한 성리학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으며, 신념이 뚜렷했을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의 침략으로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자 그는 1907년 음력 7월경에 의병에 투신하기 시작했다고 밝혀졌다. 대한제국기 정미7조약 체결 후 연해주에서 13도 창의군의 도총재로 활약한 의병장이자 위정척사론자였던 유인석 계열의 서태순(徐泰順) 의병부대에서 의병으로서 투신하였다. 그 부대에서 소모장으로 활동하던 중 당시 의병장이 전사하고 난 후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이전의 서태순 의병장이 유신석 의병장에게 전달받은 규율을 계승 받았으며 그 군율 15개조는 다음과 같다.

1. 軍物을 은닉한 자는 왜적과 더불어 참수한다.

2. 의진을 엿보아 왜적에 알린 자는 바로 참수한다.

3. 의병을 빙자하여 백성을 약탈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4.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5. 몰래 술을 마시고 떠들거나 예를 잃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6. 적과 접전할 때 겁을 내어 후퇴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7. 몰래 귀가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8. 일진회원을 보고도 죽이지 않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9. 태만하여 파발에 응하지 않은 자는 바로 참수한다.

10. 행군할 때 떠드는 자는 바로 참수한다.

11. 무기를 정제하지 않고 태만히 한 자는 바로 참수한다.

12. 파수를 볼 때 항상 시간을 지키지 않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

13. 파수를 볼 때에는 두시간씩 교대하여 보초를 선다.

14. 사사로운 일로 서로 싸운 자는 형벌에 처한다.

15. 약속을 하고서 지키지 않은 자는 형벌에 처한다.

이는 <채응언판결문>에 언급되어 있다. 부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의도로 작성되었으며 군율이 ㅁ매우 엄격했고 친일파의 저단과 주민에 대한 배려가 기본으로 되어있다고 추정할 수있다. 1908년 봄에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정비한 후 진동본진분파대장(鎭東本陣分派大將) 명의로 그 해 5월 「보국창의문(輔國倡義文)」을 발표했다. 채응언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정비한 후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전을 시작하였다. 황해도 안평 순사주재소 공격과 수안 헌병분견소 습격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군으로부터 다수의 근대식 총기를 빼앗았고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항일전을 지속했다. 1909년도 8월에서 11월에 강원도 이천군 방장면, 구당리, 황해도 곡산군 이화동, 함경남도 안변군 영풍사 대송동 등지에서 일제의 군대와 경찰, 헌병대 등과 치열하게 대항하였다. 1910년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되면서 국내에서 일제 탄압 운동을 하기 힘든 상황에도 강원도 이천, 함경남도 안변, 평안남도 성천, 황해도 곡산 등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부단히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전을 펼쳤다. 일제의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일제의 근대식 무기를 노획하는 등 채응언 의병 부대는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채응언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400명의 의병을 거느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대체로 최대 100명, 평상시는 50명 내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강두필(康斗弼) 의병부대나 강천돌(姜千突) 의병부대 등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이때 의병의 숫자는 거의 약 500명에 다다랐다고 밝혀져 있다. 일본이 군경의 탄압을 강화하고 나서는 탄압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서 부대의 단위를 10~15로 나누어 소수정에로 유격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고 밝혀져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 뒤채응언 의병 부대는 1910년 9월에 강원도 이천군 광북수비대를 공격하고 1913년 6월에 곡산군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헌병과 보조원 등을 처단하는 것, 1914년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원 읍내에 출현하는 것 등의 항일 의병 운동을 계속 하였다. 이 무렵 채응언 의병부대는 황해도 곡산군 백년산(百年山)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황해도, 함경남도, 강원도, 평안도 접경지대를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의병활동이 한일합병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제는 1914년에 들어서 대대적인 의병 탄압 작전을 벌였고 9월부터 적극적으로 의병을 탄압하고 잡아 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채응언은 1914년 11월에 당시 280원이라는 거금의 현상금이 붙었고 이 상황 속에서 1915년 7월 5일에 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에서 숨으면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에 성천분대(成川分隊) 요파출장소(了坡出張所)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뒤에 평남 성천에 일시 구금되어 있다가 7월 8일 평양 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고 7월 9일까지 단식하다가 그 후 하루에 2회 식사를 하며 일제의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는 중에도 동료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헌병대에게 조사를 받고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체포 당시 그의 옷차림은 남루한 복장에 산발한 머리카락, 신발을 신지않은 맨발이었고 수갑이 채워져 있었으며 쇠사슬로 허리가 꽁꽁 감겨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매우 대범하고 당당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채응언 의병장과 연루자 9명에 대한 공판이 1915년 8월 28일부터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렸는데 채응언은 침착하고 명석하며 자신만만하게 행동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공소하였다. 살인 및 강도죄를 적용받는 것에 불복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을 시도하였다. 채응언 의병장에 대한 재판이 9월 21일에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렸고 채응언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또 다시 상고하여 10월 28일 고등법원에서는 義賊의 명분으로 사형에 처해달라는 채응언의 주장을 기각하면서 채응언 의병장을 11월 4일 오후 2시에 평양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채응언은 교수형을 당하기 전까지도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였고 일제의 지배정책을 거부한 것이라며 강도 및 살인죄를 전혀 승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므로 조금도 수치스러운 마음이 없으며 의를 위해 죽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히며 조국을 위하여 죽는 것이 기쁘다고 당당히 말하며 순국하였다. 이처럼 채응언은 1907년브터 1915년간 한반도 중북부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의협적 농민과 우국지사를 거쳐 보국구민의 의병장으로서 약 8년간 끊임없이 일제에 투쟁한 마지막 의병장으로 자신의 의병 활동이 정당하였다고 주장하며 교수형에 처한 인물이다. 일제는 그를 체포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의병항쟁이 종식왼 것으로 간주하였고 이를 통해 채응언이 우리나라의 마지막 의병장이라고 불릴만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편집 | 원본 편집]

  • 박민영. 채응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4년 2월 29일에 확인.
  • 홍영기 (2006년 6월 1일). 〈蔡應彦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6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