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화이트코트 작전 - 현대적인 생물무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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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 전쟁사에서 다양한 무기가 등장했지만 그 중 생물학 무기는 꽤 옛날부터 그 위력을 발휘한 무기 중 하나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된 무기는 페스트(=흑사병)를 이용한 것으로 1347년 킵차크 칸국이 유럽을 공격할 때 페스트에 걸려 죽은 병사의 시체를 투석기로 성안으로 쏘아보낸 것이 그 효시가 된다. 사실 이전에도 공성전 전술 중 적군의 시체를 성 안으로 날려보내는 전술이 있긴하였다. 주로 적군의 사기를 낮추거나 질병을 일으키게 하여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식수를 오염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 되었다.

이렇든 세균전은 통제할 수 없을 뿐, 각종 전쟁에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세균전을 인간을 이용하여 실험한 사례가 하나 있다. 즉, 세균전 최초의 인간 실험인 셈인데, 이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0년 후인 1955년, 미국 유타 주의 어느 사막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개요[원본 편집]

화이트코트 작전 이라고 불린 이 실험은 1955년부터 1974년까지 무려 19년간 약 2,200명의 젊은 남자들로 구성되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원(!)했으며 탄저병, 들토끼병, 장티푸스, 뇌막염등의 총 153가지의 다양한 질병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다. 한가지 위안거리라면 19년 간 실험을 했음에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

당시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생물무기 실험을 벌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그 실험들이다! 그리고 미국은 공식적으로 '비인도적인' 생물무기 제조와 사용을 비난했지만 뒤에서는 1943년부터 생물무기 연구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용했다. 포트 데 트릭은 이 프로그램의 본부였으며 원래는 동물 실험을 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물 실험의 결과가 사람들에게도 똑같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54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위한 프로그램이 추진되었고 마침내 1955년, 화이트코트 작전을 위한 동의문서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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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1955년에 화이트코트 작전 중 하나에 대한 동의문이다.

실험 과정[원본 편집]

자원자 모집[원본 편집]

죽을 수도 있는 병에 걸리려는 자원자를 모집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 미 육군에는 이 정신나간 짓에 동의할 이상적인 군인들이 많이(?!)있었다. 바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도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총을 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주로 위생병으로 복무한 사람들이었고 담배는 물론, 술과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한 성직자의 말로 그들이 얼마나 실험대상으로 적절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지난 토요일 밤에 술을 마셔서 그러한 증상이 나타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실험책임자 월리엄 티커트 대령은 곧 이 종교의 지도자들과 만나 미군부의 '고귀한' 뜻을 전달했다. 그들의 '고귀한' 뜻을 이해한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신도를 실험대상자로 삼는데 동의했다. 이 당시에는 다들 정신이 나갔나보다.

이 종교의 총서기이며 의학 담당자인 시어도어 플레이스는 1954년 10월 19일에 정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 들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체복무의 한 유형으로서 우리 청년들이 자원하여 연구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군의학뿐만 아니라 국민건강 일반에도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몇몇 군인들은 이 위험한 실험의 대가로 고작 2주간의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

실험 시작[원본 편집]

첫 실험은 Q-fever를 이용한 실험이었다. 큐열은 심한 두통과 근육통, 그리고 고열을 일으키는 질병으로 대부분 별다른 해를 끼치는 일 없이 낫지만 이때당시는 30명 중 1명의 치사율을 보이는 질병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실험의 그룹은 총 30명이었다. 그들은 첫 야외실험(?!)의 대상자였는데 이 야외실험을 하기 전, 통제된 실험실에서 한 실험이 있었는데 이 실험이 8번 공을 이용한 실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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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 공이라고 불리는 실험 장비. 이 공은 현재도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대략 지름 13m 크기이다.

실험참가자들이 8번 공 안에 들어가 심호흡을 하면 연구진들은 그 안으로 다양한 질병을 살포했다. 약 1분간의 호흡이 끝나면 샤워를 하고 자외선 램프를 쬐다가 다시 샤워를 했다. 그리고 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어 격리된 후 관찰하는 실험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통제된 실험 이후 연구진들은 본격적으로 사막 한가운데에서 야외실험(!)을 했다. 바람이 좋은 1955년 7월 12일 유타주의 한 사막에서 대략 1L에 달하는 병원균이 살포되었고 실험참가자들은 그 병원균을 양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역시 병원에서 격리되었는데 참가자들을 위한 오락기구와 책이 갖춰진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지내며 두통이 시작되기를 기다렸고 실제로 첫 야외실험에서 3분의 1 정도가 Q열에 걸렸다. 이전의 '8번 공 실험'에서의 면역 정도가 그들의 감염정도를 결정했는데 이들은 하루나 그 이상 걸려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이러한 실험이 19년간 계속되었으며 징병제가 폐지되고 모병제가 실시된 1973년에야 끝이 났다.

그리고 사막에 살포된 세균들은 강한 햇빛을 받고 모두 죽었다고 한다. 또한 경보기로 설치해둔 55km 떨어진 기니피그들은 멀쩡했다고 전해진다.

실험 이후[원본 편집]

위험한 실험이었지만 19년간 사망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심지어 2001년 9월 11일에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받은 이후 이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TV에 나가 인터뷰도 하는 등, 군이나 해당 종교에서는 미국의 세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생명을 구한 백신과 치료법을 찾는 등 전체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로 '진짜 영웅들'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2001년 장기적인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건강질문서를 돌려 답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1960년대에 비폭력을 주장하던 교회에서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냐는 의문과 그에 따른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실험으로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한 공로는 부정할 순 없지만 그 방법으로 인해 비판받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은 실험 윤리가 강화되어 인간에게 일부러 질병을 걸리게 하는 이런 정신나간 방법으론 '공식적인' 실험을 하진 못한다. 또 모르지 저것도 뒤로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