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파놉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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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Panopticon

누군가가 감시를 하지 않아도 항상 감시를 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개요[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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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로 유명한 제러미 벤담이 처음 생각해낸 원형 감옥.

현대에 와선 의미가 확장되어 개인 정보가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거대한 정보사회의 감시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감시사회를 이야기할때,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와 함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다.

기본적인 형태는 바로 위의 그림과 같다. 가운데에 있는 원형 구조물에는 감시자가 들어가고 그곳을 둘러싼 원형구조물에는 죄수들이 들어가게 된다. 수용실 문은 내부가 보이도록 만들고 그 앞에는 좁은 복도가 설치된다. 중앙의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는 반면 죄수의 방은 밝게 한다. 이는 중앙에서 감시하는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죄수들이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파놉티콘은 중앙의 원형 감시탑에서 각 수용실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감시 권력이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수용자가 항상 감시당하고 있는 상태다. 즉, 감시자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지만 끊임없이 감시되는 상태를 그 핵심개념으로 한다.

이렇게 되면 죄수들은 항상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아 자기자신을 감시하는 상황에 이른다.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효율적인 면에서는 최상의 효과를 자랑하는 감옥의 형태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실제 현재 존재하는 교도소는 파놉티콘식으로 지어진 것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현대의 교도소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교화'를 중점으로 하지만 파놉티콘은 오로지 '효율적인 감시'에 목적을 두고 만든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래[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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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 청사진.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1791년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일종의 감옥 선축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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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Bentham, 1748.2.15 ~ 1832 6.6

파놉티콘은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라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으로 직역하면 모두 다 본다는 뜻이다. 말그대로 파놉티콘식으로 지어진 감옥에서는 1명의 교도관만 존재해도 모든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다. 죄수들 하나하나가 자기자신의 감시자가 되는 오묘한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눈이 100개 달린 거인 아르고스를 참고 했다고 한다. 아르고스의 별명이 바로 모든 것을 본다라는 뜻의 파놉테스였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자인 벤담은 최소한의 비용, 최소한의 감시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파놉티콘을 이상적인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경구로 잘 알려진 벤담 철학의 근저에는 사회 다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죄수를 '영원한 고독'의 상태로 24시간 감시하고 이들에게 감자만 먹인 채로 강제 노동을 시키고 그 결과를 착취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파놉티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벤담이 설계한 이 파놉티콘은 생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파놉티콘 개념을 다시 부활시키고 고찰했다. 푸코의 파놉티콘은 현대 정보화 시대의 '전자 감시'와 매우 흡사하다. 파코에게 파놉티콘은 근대 권력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장치이다. 파놉티콘의 감시체계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어 규범사회의 기본 원리인 파놉티시즘(panoticism)으로 바뀌었음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이러한 인식을 한 단계 더 추상적인 차원으로 일반화시켰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푸코의 규율 사회를 벗어난 새로운 '통제 사회'라고 주장했다.1

응용[원본 편집]

파놉티콘은 푸코의 파놉티시즘으로 다시 부활하여 다양한 파생개념들을 낳았다. 단순히 감시를 위한 감옥이라는 단순한 개념에서 출발한 이 디자인의 개념 자체가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선술했다시피 파놉티콘이 실제로 만들어진 사례는 거의 없으나 그 개념만이 남아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놉티콘[원본 편집]

시놉티콘(Synopticon)이란 역파놉티콘이라고도 한다. 즉 감시를 받던 피감자들이 역으로 감시자들을 감시하게 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놉티콘은 파놉티콘의 권력자를 견제하는 메커니즘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 경우 소수의 감시자와 다수의 파감시자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이 조성된다. 이러한 이중 구조를 '시놉티콘'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으로 '언론'의 존재가 바로 시놉티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일반적인 국민도 시놉티콘의 상황 속에 놓여있다. 예전에는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언론만이 할 수 있었으나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다수가 소수의 권력을 (예전보다는) 쉽게 감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시놉티콘 개념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문에 쉬운(?) 감시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더불어민주당측에서 '문자행동'이라고 이름붙인, 국회의원에게 문자보내는 행위 또한 바로 시놉티콘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파놉티시즘[원본 편집]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한 말로,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모두가 소수의 권력에 의해 감시당한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중세시대부터 현대까지의 감옥의 역사를 통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권력관계를 파헤치는 책이다. 감옥의 각종 장치의 발견을 통해서 권력은 어떻게 한 개인의 신체를 조종하려고 하는지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홀롭티시즘[원본 편집]

홀롭티시즘(Holopticism)이란 당초 정보기술 발달의 부작용으로 우려됐던 '파놉티시즘'의 반대말이다. '홀롭티시즘'이라는 말은 곤충의 눈처럼 수백 개의 홑눈이 겹쳐 있는 복안 구조를 뜻하는 홀롭틱(Holoptic)에서 따왔다. 평범한 개인이라도 정보기술의 발달로 수천, 수만 개의 겹눈을 가지게 되어 전체 상황을 훑어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됐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