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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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과 전개==
==전쟁 발발과 전개==
===전쟁 전야===
===전쟁 전야===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무척이나 평온했다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무척이나 평온했다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만, 북한이 먼저 침공한 것과 철저하게 전면전을 계획해왔다는 점 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북측에는 소련, 남측에는 미국의 군정이 들어서자 이미 광복 직후부터 [[3.8선]]부근에 국지적인 교전이 수도없이 발발했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전쟁의 위험은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북측에는 소련, 남측에는 미국의 군정이 들어서자 이미 광복 직후부터 [[3.8선]]부근에 국지적인 교전이 수도없이 발발했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전쟁의 위험은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고, 결국 승인을 받아냈다. 당시 남측에서는 많은 수의 군인들이 휴가로 인해 부대가 텅터
=== 발발 배경 ===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한은 대한민국 만큼이나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다.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계가 들어서긴 했지만 문제는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를 받는 만큼 소련에 오래 머무르고 있었고 이에 한반도 내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활동하며 한반도 내에 기반을 쌓아둔 여러 좌익 세력들은 김일성에게 있어 최고의 우군이자 동시에 최악의 적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군정의 개입으로 점차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 좌익 세력들이 하나둘 탄압을 받아 위축되기 시작하자 이들은 대거 북쪽으로 몰려들어왔고 김일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커다란 도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커다란 위협이기도 했다. 특히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은 그 쪽수도 많아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결국 김일성은 박헌영을 교묘하게 괴롭혀서 그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일단 힘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명목상으로는 김일성이 먼저 한반도 이북에 자리를 잡아둔 사람이였으니 박헌영 또한 김일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자 결국 가만히 있으나 도망을 치나 김일성에게 죽을 판이였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쪽을 참공하면 남쪽의 남로당원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제안을 건네었다. 마침 김일성 또한 남쪽을 흡수하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어 이에 동의하였고 결국 스탈린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스탈린도 막 2차 세계대전을 끝낸 터라 더 이상의 전쟁만큼은 피하고 싶어 처음엔 거절했으나, 철저하게 한반도 안에서 다 정리하겠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에 비밀리에 이를 승인하고 만다.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이 한반도에서 분탕을 침으로서 미국과 자유주의 세력의 시선이 한반도로 쏠리는 사이 여러 이권을 챙길 목적이였음이 후일 드러났다.


===북한의 기습남침===
===북한의 기습남침===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이 휴전선을 넘었다.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이 휴전선을 넘었다. 당시 북한은 이미 38선 이북에 다수의 병력을 몰빵시키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측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기강이 헤이해져있었고, 때마침 농번기라 많은 군인들이 고향집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휴가를 나가는 등 말 그대로 막장이였다.


===낙동강 전선===
===낙동강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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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영향===
===부정적 영향===
===긍정적 영향===
===긍정적 영향===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있다.
====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관련 작품==
==관련 작품==
==같이 보기==
==같이 보기==

2015년 5월 18일 (월) 17:43 판

틀:넘겨주기 있음 Korean War 틀:학술 관련 정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개요

전쟁 발발과 전개

전쟁 전야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무척이나 평온했다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만, 북한이 먼저 침공한 것과 철저하게 전면전을 계획해왔다는 점 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북측에는 소련, 남측에는 미국의 군정이 들어서자 이미 광복 직후부터 3.8선부근에 국지적인 교전이 수도없이 발발했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전쟁의 위험은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발발 배경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한은 대한민국 만큼이나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다.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계가 들어서긴 했지만 문제는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를 받는 만큼 소련에 오래 머무르고 있었고 이에 한반도 내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활동하며 한반도 내에 기반을 쌓아둔 여러 좌익 세력들은 김일성에게 있어 최고의 우군이자 동시에 최악의 적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군정의 개입으로 점차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 좌익 세력들이 하나둘 탄압을 받아 위축되기 시작하자 이들은 대거 북쪽으로 몰려들어왔고 김일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커다란 도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커다란 위협이기도 했다. 특히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은 그 쪽수도 많아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결국 김일성은 박헌영을 교묘하게 괴롭혀서 그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일단 힘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명목상으로는 김일성이 먼저 한반도 이북에 자리를 잡아둔 사람이였으니 박헌영 또한 김일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자 결국 가만히 있으나 도망을 치나 김일성에게 죽을 판이였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쪽을 참공하면 남쪽의 남로당원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제안을 건네었다. 마침 김일성 또한 남쪽을 흡수하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어 이에 동의하였고 결국 스탈린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스탈린도 막 2차 세계대전을 끝낸 터라 더 이상의 전쟁만큼은 피하고 싶어 처음엔 거절했으나, 철저하게 한반도 안에서 다 정리하겠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에 비밀리에 이를 승인하고 만다.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이 한반도에서 분탕을 침으로서 미국과 자유주의 세력의 시선이 한반도로 쏠리는 사이 여러 이권을 챙길 목적이였음이 후일 드러났다.

북한의 기습남침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이 휴전선을 넘었다. 당시 북한은 이미 38선 이북에 다수의 병력을 몰빵시키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측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기강이 헤이해져있었고, 때마침 농번기라 많은 군인들이 고향집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휴가를 나가는 등 말 그대로 막장이였다.

낙동강 전선

인천 상륙 작전

중국의 참전 그리고 1·4 후퇴

지리한 휴전협상

마침내 휴전 그리고

휴전 이후

전쟁의 영향

부정적 영향

긍정적 영향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있다.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관련 작품

같이 보기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