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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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혜옹주는 조선시대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났다.  
{{정보상자
6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3명은 죽고 오빠들인 순종,의친왕,영천왕 이렇게 3형제만 남아 왕실의 유일한 옹주였다.
|전체모양    =
2. 옹주가 2개월이 되어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자, 고종은 그녀의 처소를 함녕전으로 옮기고 자신과 함께 기거하기 시작한다.
|제목        = 이덕혜<br/>{{-1|덕혜옹주}}
3. 옹주가 5살이 되던 해에는 덕수궁 안 즉조당에 옹주가 다닐 수 있게 유치원을 만들어서 노래와 예절 등을 배우도록 하였다.
|제목모양    =
4. 일본이 정해 놓은 왕공족에 의해 호를 받지 못하고 복녕당 아가씨 혹은 집현전 아가씨라 불리우다가 옹주의 나이 10살이 돼서야 정식으로 덕혜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림        = [[파일:덕혜옹주;황족화보;국립고궁박물관.jpg|200px]]
5.옹주는 10살 때 1921년 일출심상소학교 2학년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림모양    =
6.1925년 덕혜옹주가 5학년일 때에 옹주의 일본 유학이 정해진다.
|그림설명    = 12살 이전의 사진<ref group="출처">황족화보 제224호 수록, 국립고궁박물관</ref>
일본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덕혜옹주는 웃음을 잃어버린다.
|그림설명모양  =
7.덕헤옹주는 영친왕의 집에 붙어있는 건물에 기거하면서 학습원에 다녔으며 자신도 아버지인 고종처럼 독살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매일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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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26년 순종이 위중해 지면서 옹주는 조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순종이 4월에 서거를 하고 덕혜옹주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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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후인 1929년 옹주의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돌아가자 덕혜옹주는 서서히 신경쇠약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병세가 심각해져 정신과 진료를 받은 결과 조발성치매로 진단돼 치료를받는다.
|내용모양    =
10.1931년 일본은 덕혜옹주에게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 타케유키와 결혼을 하라고 명 한다. (영천왕과 영천왕비는 덕혜옹주의 학교 공부로 인해 결혼을 늦춰야 한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듣지 않고 결혼을 서두른다.)
 
11.덕혜옹주는 1931년 5월 8일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은 나가타쵸에 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백작부인이 된다.
|주제1 = 주제만 입력
12.1932년 8월에 옹주는 외동딸 마사에를 낳지만 정신분열증이 더욱 악화되었다.
|항목1 = 이름
13.그녀는 1946년에 도쿄에 있는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져만 갔다.
|내용1 = 이덕혜李德惠
14.1950년 김을한이 그녀를 찾으면서 그녀의 행방이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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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혜는 [[조선]]의 26대 왕 [[대한제국 고종|고종]] 이형과 귀빈 양춘기의 딸로 조선의 왕족이다. [[조선]]의 27대 왕 순종의 배다른 누이가 된다. 열 명의 오누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일찍 죽고 순종·의친왕 이강·영친왕 이은을 오누이로 두었다.
 
 
 
 
 
 
 
 
 
 
 
 
 
 
 
__목차__
{{-}}
==생애==
 
===어린 시절===
 
[[파일:덕혜옹주;돌;국립고궁박물관.png|가운데|200px]]
<p style="text-align:center;">{{-1|돌 무렵의 사진}}<ref group="출처">국립고궁박물관</ref></p>
 
덕혜옹주는 조선시대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났다. 일곱 명의 형제와 세 명의 자매가 있었지만 자매 셋은 모두 죽고 형제 또한 이척·이강·이은의 셋만 남아 왕가의 유일한 여식이었다.
 
옹주가 2개월이 되어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자, 고종은 그녀의 처소를 함녕전으로 옮기고 자신과 함께 기거하기 시작한다.
 
옹주가 5살이 되던 해에는 덕수궁 안 즉조당에 옹주가 다닐 수 있게 유치원을 만들어서 노래와 예절 등을 배우도록 하였다. 위로 누이 셋이 모두 일찍 죽어 사실상 고명딸이었기에 고종이 매우 예뻐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정해 놓은 왕공족에 의해 호를 받지 못하고 복녕당 아기씨 혹은 집현전 아기씨라 불리우다가 옹주의 나이 10살이 돼서야 정식으로 덕혜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
 
옹주는 9살 때 1921년 일출심상소학교 2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고, 1925년 덕혜옹주가 14살일 때에 옹주의 일본 유학이 정해진다. 일본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덕혜옹주는 웃음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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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덕혜옹주;디지털장서각;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10.png
파일:덕혜옹주;디지털장서각;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19.png
파일:덕혜옹주;디지털장서각;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23.png
</gallery>
<p style="text-align:center;">{{-1|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무렵의 사진}}<ref group="출처">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 디지털장서각</ref></p>
 
 
덕헤옹주는 영친왕의 집에 붙어있는 건물에 기거하면서 학습원에 다녔으며 자신도 아버지인 고종처럼 독살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매일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1926년 순종이 위중해 지면서 옹주는 조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순종이 4월에 서거를 하고 덕혜옹주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게 된다.
 
3년 후인 1929년 옹주의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돌아가자 덕혜옹주는 서서히 신경쇠약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병세가 심각해져 정신과 진료를 받은 결과 조발성치매로 진단돼 치료를 받는다.
 
===어른 시절===
 
1931년 일본은 덕혜옹주에게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 타케유키와 결혼을 하라고 명 한다. (영천왕과 영천왕비는 덕혜옹주의 학교 공부로 인해 결혼을 늦춰야 한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듣지 않고 결혼을 서두른다.)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8일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은 나가타쵸에 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백작부인이 된다.
 
1932년 8월에 옹주는 외동딸 마사에를 낳지만 정신분열증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녀는 1946년에 도쿄에 있는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져만 갔다.
 
1950년 김을한이 그녀를 찾으면서 그녀의 행방이 알려지게 된다.
 
{{각주}}
<references group="출처"/>

2023년 10월 29일 (일) 06:23 판

이덕혜
덕혜옹주
덕혜옹주;황족화보;국립고궁박물관.jpg
12살 이전의 사진[출처 1]
주제만 입력
이름 이덕혜李德惠
봉호 덕혜옹주德惠翁主
생몰 1912. 5. 25. ~ 1989. 4. 21.
집안 조선 왕가
전주 이씨
어버이 아버지 | 고종 이형李㷗
어머니 | 복녕당 양춘기梁春基

이덕혜는 조선의 26대 왕 고종 이형과 귀빈 양춘기의 딸로 조선의 왕족이다. 조선의 27대 왕 순종의 배다른 누이가 된다. 열 명의 오누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일찍 죽고 순종·의친왕 이강·영친왕 이은을 오누이로 두었다.








생애

어린 시절

덕혜옹주;돌;국립고궁박물관.png

돌 무렵의 사진[출처 2]

덕혜옹주는 조선시대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났다. 일곱 명의 형제와 세 명의 자매가 있었지만 자매 셋은 모두 죽고 형제 또한 이척·이강·이은의 셋만 남아 왕가의 유일한 여식이었다.

옹주가 2개월이 되어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자, 고종은 그녀의 처소를 함녕전으로 옮기고 자신과 함께 기거하기 시작한다.

옹주가 5살이 되던 해에는 덕수궁 안 즉조당에 옹주가 다닐 수 있게 유치원을 만들어서 노래와 예절 등을 배우도록 하였다. 위로 누이 셋이 모두 일찍 죽어 사실상 고명딸이었기에 고종이 매우 예뻐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정해 놓은 왕공족에 의해 호를 받지 못하고 복녕당 아기씨 혹은 집현전 아기씨라 불리우다가 옹주의 나이 10살이 돼서야 정식으로 덕혜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었다.

옹주는 9살 때 1921년 일출심상소학교 2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고, 1925년 덕혜옹주가 14살일 때에 옹주의 일본 유학이 정해진다. 일본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덕혜옹주는 웃음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무렵의 사진[출처 3]


덕헤옹주는 영친왕의 집에 붙어있는 건물에 기거하면서 학습원에 다녔으며 자신도 아버지인 고종처럼 독살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매일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1926년 순종이 위중해 지면서 옹주는 조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순종이 4월에 서거를 하고 덕혜옹주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게 된다.

3년 후인 1929년 옹주의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돌아가자 덕혜옹주는 서서히 신경쇠약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병세가 심각해져 정신과 진료를 받은 결과 조발성치매로 진단돼 치료를 받는다.

어른 시절

1931년 일본은 덕혜옹주에게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 타케유키와 결혼을 하라고 명 한다. (영천왕과 영천왕비는 덕혜옹주의 학교 공부로 인해 결혼을 늦춰야 한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듣지 않고 결혼을 서두른다.)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8일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은 나가타쵸에 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백작부인이 된다.

1932년 8월에 옹주는 외동딸 마사에를 낳지만 정신분열증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녀는 1946년에 도쿄에 있는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사라져만 갔다.

1950년 김을한이 그녀를 찾으면서 그녀의 행방이 알려지게 된다.

각주

  1. 황족화보 제224호 수록, 국립고궁박물관
  2. 국립고궁박물관
  3.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 디지털장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