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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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1918년 11월 28일자 논설 "대한민족의 시국 문제"에서도, 벨기에나 폴란드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이번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경우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도 있지만,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한국이 강화회의로부터 어떤 성과를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1919년 1월 23일자 <신한민보> 논설 "민족자결주의에 대하여"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자체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열강이 각국 인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제출한 선전용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파리 강화 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기회적 외교'를 시험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신한민보> 1918년 11월 28일자 논설 "대한민족의 시국 문제"에서도, 벨기에나 폴란드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이번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경우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도 있지만,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한국이 강화회의로부터 어떤 성과를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1919년 1월 23일자 <신한민보> 논설 "민족자결주의에 대하여"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자체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열강이 각국 인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제출한 선전용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파리 강화 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기회적 외교'를 시험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사회의 반응도 비슷했다. [[2·8 독립선언]]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서춘]](徐椿)은 1918년 11월 22일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학우회 편집부 주최 현상연합웅변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사회의 반응도 비슷했다. [[2·8 독립선언]]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서춘(徐椿)은 1918년 11월 22일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학우회 편집부 주최 현상연합웅변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인용문2|“이번 전쟁에서 각국 모두 정의인도를 주장하지만 이는 표면의 언사일 뿐 만약 미국이 주의가 진실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이라면 무슨 이유로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는가. 영국에서는 진실로 정의 인도를 설파한다면 어째서 인도를 독립시키지 않는가. 모두 입으로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말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의도 인도도 없다. 개인 간에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대등이 주장할 수 있더라도, 나라와 단체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어떤 이익도 향유할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말보다 실력의 향상에 노력한 뒤에 정의 인도를 주창해야할 것이다.}}
{{인용문2|“이번 전쟁에서 각국 모두 정의인도를 주장하지만 이는 표면의 언사일 뿐 만약 미국이 주의가 진실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이라면 무슨 이유로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는가. 영국에서는 진실로 정의 인도를 설파한다면 어째서 인도를 독립시키지 않는가. 모두 입으로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말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의도 인도도 없다. 개인 간에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대등이 주장할 수 있더라도, 나라와 단체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어떤 이익도 향유할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말보다 실력의 향상에 노력한 뒤에 정의 인도를 주창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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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과정 ==
== 전개 과정 ==
=== 폭풍 전야 ===
=== 폭풍 전야 ===
1918년 6~7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김규식 (1881년)|김규식]](金奎植)·[[장덕수]](張德秀)·[[김철 (1886년)|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조동호 (1892년)|조동호]](趙東祜)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1918년 6~7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장덕수]](張德秀)·[[김철 (1886)|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조동호]](趙東祜)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李承晩)·[[민찬호 (1877년)|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9년 2월 [[조소앙]](趙素昻)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김교헌]](金敎獻)·[[김규식 (1882년)|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1919년 3월 11일 발표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9년 2월 [[조소앙]](趙素昻)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김교헌]](金敎獻)·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1919년 3월 11일 발표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렇듯 미국, 상하이, 만주 등 해외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도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과 쌀 가격 폭등으로 인한 생활고,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독립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6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고종은 사망 직전만 해도 아들 순종보다 건강한 편이었기에, 그의 사망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세간에서는 고종이 일제 관헌과 친일파 대신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아직 근왕 의식을 품고 있었던 백성들은 이 소문에 격분했다. 총독부는 매일신보를 통해 독살설이 거짓이라고 발표했지만, 소문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했다.
이렇듯 미국, 상하이, 만주 등 해외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도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과 쌀 가격 폭등으로 인한 생활고,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독립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6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고종은 사망 직전만 해도 아들 순종보다 건강한 편이었기에, 그의 사망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세간에서는 고종이 일제 관헌과 친일파 대신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아직 근왕 의식을 품고 있었던 백성들은 이 소문에 격분했다. 총독부는 매일신보를 통해 독살설이 거짓이라고 발표했지만, 소문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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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문은 국내에 있는 1천8백만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자임하였다. 호소문에서 ‘미국인들 역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기독교 사상과 인류애의 편에서 정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지와 동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기마대와 악단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여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조인된 독립관에 집결하였다. ‘대한공화국임시정부’ ‘국무경’의 자격으로 이승만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서명했던 헨콕이 앉았던 자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서 독립관장의 환영사를 들었으며, 영문으로 된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재정 지원 역할을 수행했다.
호소문은 국내에 있는 1천8백만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자임하였다. 호소문에서 ‘미국인들 역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기독교 사상과 인류애의 편에서 정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지와 동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기마대와 악단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여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조인된 독립관에 집결하였다. ‘대한공화국임시정부’ ‘국무경’의 자격으로 이승만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서명했던 헨콕이 앉았던 자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서 독립관장의 환영사를 들었으며, 영문으로 된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재정 지원 역할을 수행했다.
== [[일본 제국]]의 대응 ==
== 일본 제국의 대응 ==
3·1 운동 소식을 접한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조선 통치에 대한 비판이 일본 언론을 장식했고, 제국체제의 재편이나 개조까지 거론되었다. 3·1 운동 직후 신임 조선 총독이 된 [[사이토 마코토]]는 경성일보 사장을 맡다가 1918년에 그만뒀던 기자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를 참모로 삼고,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을 조사하게 했다. 1920년 5월 시찰을 명목으로 조선에 방문한 아베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지방 유지들과 교류하고, 경성에 이른 뒤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때의 시찰 여행을 바탕으로 <아베 미쓰이에 의견>을 작성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조선 통치에 대한 비판이 일본 언론을 장식했고, 제국체제의 재편이나 개조까지 거론되었다. 3·1 운동 직후 신임 조선 총독이 된 [[사이토 마코토]]는 경성일보 사장을 맡다가 1918년에 그만뒀던 기자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를 참모로 삼고,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을 조사하게 했다. 1920년 5월 시찰을 명목으로 조선에 방문한 아베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지방 유지들과 교류하고, 경성에 이른 뒤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때의 시찰 여행을 바탕으로 <아베 미쓰이에 의견>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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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화통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많은 지식인이 이 시기에 친일파로 전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차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해서, 3·1 운동 이후에도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민족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중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내선일체]])을 단행해 [[8.15 광복]] 이전까지 추진했다.
이러한 문화통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많은 지식인이 이 시기에 친일파로 전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차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해서, 3·1 운동 이후에도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민족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중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내선일체]])을 단행해 [[8.15 광복]] 이전까지 추진했다.
== 여담 ==
== 여담 ==
* 3·1 운동은 [[친일파]] 인사들에게도 큰 위기감을 안겼다. [[이완용]]은 만세시위를 당장 중단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수 차례 발표했고, [[박중양]]은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독립은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대중을 귀가시키기 위한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아 만세시위 진압에 적극 협조했다.
* 3·1 운동은 [[친일파]] 인사들에게도 큰 위기감을 안겼다. [[이완용]]은 만세시위를 당장 중단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수 차례 발표했고, [[박중양]]은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독립 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독립은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대중을 귀가시키기 위한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아 만세시위 진압에 적극 협조했다.
*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3월 1일을 처음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6년 미군정 시기 군정법률 제2호를 통해 국가경축일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 후인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때 [[3·1절]]이 정식으로 도입되었다.
*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3월 1일을 처음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6년 미군정 시기 군정법률 제2호를 통해 국가경축일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 후인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때 [[3·1절]]이 정식으로 도입되었다.
* 중국에서는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서양과 일본의 경제 침탈과 군벌의 전횡에 대항한 [[5·4 운동]]이 발발했고, [[자와할랄 네루]]는 딸 인디라 간디에게 3·1 운동에 참여한 한인들을 찬양하며, 이들을 본받길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중국에서는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서양과 일본의 경제 침탈과 군벌의 전횡에 대항한 [[5·4 운동]]이 발발했고, [[자와할랄 네루]]는 딸 인디라 간디에게 3·1 운동에 참여한 한인들을 찬양하며, 이들을 본받길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영국과 일본 관계 변화
언론이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잔학 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당시 동맹국인 영국에 책임을 묻기 시작하자 영국 외무성 역시 조선 내 일제의 잔학 행위 문제를 들어 영일동맹의 가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 역시 자국 식민지에서 유사한 잔학 행위로 논란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밀어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계도 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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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분류:한국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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