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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공화국'''({{llang|fr|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 III<sup>e</sup> République}})은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된 1870년 9월 4일부터 1940년 7월 10일,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형성된 [[비시 프랑스|비시 정권]]이 선포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던 공화정 체제였다. | '''프랑스 제3공화국'''({{llang|fr|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 III<sup>e</sup> République}})은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된 1870년 9월 4일부터 1940년 7월 10일,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형성된 [[비시 프랑스|비시 정권]]이 선포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던 공화정 체제였다. | ||
이러한 | 이러한 제3공화국의 형성 초기인 1870년과 1871년 사이에는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폐위된 이후에도 계속 [[보불전쟁|전쟁]]을 수행하였는데 이미 제2제국 시기에 주력 야전군이 전멸당한 탓에 끌어올 수 있는 병력은 모자랐고, 결국 전쟁의 패전은 코앞까지 다가오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제3공화국 체제에 반발하여 [[파리 코뮌]]이 들어서고, 왕당파가 준동하는 등의 정치적 혼란이 제3공화국 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말으며, 결국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들이 [[독일 제국]]으로 재편되었음을 선언했으며 프랑스의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가고 만다. | ||
이 때문에 [[아돌프 티에르]]와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1880년대에는 왕당파가 득세한 의회가 다시 부르봉 왕정복고을 고려하기에 이르렀으나 국왕의 권력을 어느 정도로 제한할 것인지, 또 왕위의 후계를 부르봉 본가가 아닌 오를레앙 가문에 넘겨줄 것인지 등과 같은 의견 차이는 해결되지 않았고 갈등만 불거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공화파는 왕당파를 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고, 공화정은 프랑스의 향구적인 정체로 굳어지게 된다. | 이 때문에 [[아돌프 티에르]]와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1880년대에는 왕당파가 득세한 의회가 다시 부르봉 왕정복고을 고려하기에 이르렀으나 국왕의 권력을 어느 정도로 제한할 것인지, 또 왕위의 후계를 부르봉 본가가 아닌 오를레앙 가문에 넘겨줄 것인지 등과 같은 의견 차이는 해결되지 않았고 갈등만 불거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공화파는 왕당파를 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고, 공화정은 프랑스의 향구적인 정체로 굳어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