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편집하기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

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4번째 줄: 4번째 줄:
강경한 쇄국정책을 추구하던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1873년에 실각한 뒤 일본의 치밀한 각본 하에 발생한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1875년 조선의 최초 근대적 외교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행위와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1882년에 [[임오군란]]을 계기로 하여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파괴되면서 일본은 이를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종주국을 자처중이던 [[청나라]] 역시 일본보다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강경한 쇄국정책을 추구하던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1873년에 실각한 뒤 일본의 치밀한 각본 하에 발생한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1875년 조선의 최초 근대적 외교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행위와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1882년에 [[임오군란]]을 계기로 하여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파괴되면서 일본은 이를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종주국을 자처중이던 [[청나라]] 역시 일본보다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1884년]] [[12월 4일]] 일본의 후원 아래 감행된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으며 이후 1885년 [[텐진 조약]]에 따라 청, 일 양국은 조선에 파병한 군대의 공동철수와 차후 조선에 파병할 경우 사전에 통고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의 확산에 따라 조선 정부가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그 해 6월 9일 3천명의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도 조선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하에 7천명의 병력을 인천을 통해 상륙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어느 정도 평정되자 청은 일본에 대해 동시 철병을 제안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동시 철병을 지지하였음에도 일본은 이번 기외에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청의 제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청은 그와 같은 제안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일부러 충돌을 야기시켜 정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전환시키고자 했던 일본은 청과의 회담이 결렬되자 7월 29일 [[성환읍|성환]]에 주둔중이던 청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게 되었다.
{{날짜/출력|1884-12-4}} 일본의 후원 아래 감행된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으며 이후 1885년 [[텐진 조약]]에 따라 청, 일 양국은 조선에 파병한 군대의 공동철수와 차후 조선에 파병할 경우 사전에 통고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의 확산에 따라 조선 정부가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그 해 6월 9일 3천명의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도 조선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하에 7천명의 병력을 인천을 통해 상륙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어느 정도 평정되자 청은 일본에 대해 동시 철병을 제안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동시 철병을 지지하였음에도 일본은 이번 기외에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청의 제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청은 그와 같은 제안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일부러 충돌을 야기시켜 정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전환시키고자 했던 일본은 청과의 회담이 결렬되자 7월 29일 [[성환읍|성환]]에 주둔중이던 청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게 되었다.


==전쟁 발발==
==전쟁 발발==
7월 29일의 성환 전투를 통해 일본이 선빵을 날리면서 청일 양국은 8월 1일 상호간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ㅊ|일단 [[진주만 기습|선빵]]부터 날리고 선전포고하는 건 일본 종특인 듯}}<ref>이 전투는 청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였으나 지휘관의 무능으로 패배. 이로인해 평양성에 집결한 청 육군은 근대화된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ref> 동시에 청은 압록강을 거쳐서, 일본은 일본과 부산을 거쳐 각각 조선으로 증원군을 파병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진행되었다.
7월 29일의 성환 전투를 통해 일본이 선빵을 날리면서 청일 양국은 8월 1일 상호간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ㅊ|일단 [[진주만 기습|선빵]]부터 날리고 선전포고하는건 일본 종특인 듯}}<ref>이 전투는 청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였으나 지휘관의 무능으로 패배. 이로인해 평양성에 집결한 청 육군은 근대화된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ref> 동시에 청은 압록강을 거쳐서, 일본은 일본과 부산을 거쳐 각각 조선으로 증원군을 파병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진행되었다.


==전쟁 초기 양측 주요 세력 및 작전계획==
==전쟁 초기 양측 주요 세력 및 작전계획==
35번째 줄: 35번째 줄:


{{주석}}
{{주석}}
[[분류:청일전쟁| ]]
[[분류:전쟁]]
[[분류:1894년 분쟁]]
[[분류:조선]]
[[분류:청나라]]
[[분류:일본 제국]]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