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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啓福(또는 蔡桂福). 영문명은 Choi Kei-Pok.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蔡啓福(또는 蔡桂福). 영문명은 Choi Kei-Pok.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
== 생애 == | == 생애 == | ||
1900년 10월 10일 함경남도 문천군 군내면 장평리에서 [[독립유공자]] | 1900년 10월 10일 함경남도 문천군 군내면 장평리에서 [[독립유공자]] 채성하(蔡聖河)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이 경성에 올라가서 정신여학교에 재학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4일 이화학당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할 때 정신여학교 대표로 참여했고, 3월 5일 서울역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부친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고, 12명의 간호사가 미국적십자사로부터 간호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1920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독립선언기념회 부원, 애국부인회 서기로 활동햇다. | ||
1920년 4월 조선은행 회령지점으로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송금중이던 수송차를 습격하여 독립군자금을 확보했던 [[최이붕]]이 총상을 입고 그녀의 자택에 피신하자, 채계복은 아버지 채성하와 함께 정성껏 간호했으며, 그를 위해 의연금을 모집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정을 감행한 후 한인들을 탄압하자, 그녀는 중국 지린성 연길현으로 피신한 뒤 한국적십자사 간호부로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부인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7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원산여자청년동맹 교양집행위원을 맡았고, 1930년 4월 근우회 원산지회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 1920년 4월 조선은행 회령지점으로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송금중이던 수송차를 습격하여 독립군자금을 확보했던 [[최이붕]]이 총상을 입고 그녀의 자택에 피신하자, 채계복은 아버지 채성하와 함께 정성껏 간호했으며, 그를 위해 의연금을 모집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정을 감행한 후 한인들을 탄압하자, 그녀는 중국 지린성 연길현으로 피신한 뒤 한국적십자사 간호부로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부인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7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원산여자청년동맹 교양집행위원을 맡았고, 1930년 4월 근우회 원산지회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