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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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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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위치한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의 사당.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위치한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의 사당.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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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교리에 따라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니만큼 건축 양식도 유교 양식을 충실하게 따라서 이 엄청난 규모에도 화려함 없이 검소하게 지어서 자연스러운 느낌과 경건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종묘 관리도 굉장히 경건한 마음으로 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들어가보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어느 정도냐 하면 평소에 침을 찍찍 뱉던 사람도 침을 그냥 삼키게 되고 발걸음을 조심하게 될 정도.
[[유교]] 교리에 따라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니만큼 건축 양식도 유교 양식을 충실하게 따라서 이 엄청난 규모에도 화려함 없이 검소하게 지어서 자연스러운 느낌과 경건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종묘 관리도 굉장히 경건한 마음으로 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들어가보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어느 정도냐 하면 평소에 침을 찍찍 뱉던 사람도 침을 그냥 삼키게 되고 발걸음을 조심하게 될 정도.


종묘의 신성한 분위기를 진짜로 제대로 느끼고 싶으면 안개가 껴있거나 안개비가 내리는 조용한 [[새벽]]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새벽에 안개가 낀 상태에서 종묘 외대문의 매표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새벽부터 와서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일본인]]들이 맞이한다.
종묘의 신성한 분위기를 진짜로 제대로 느끼고 싶으면 안개가 껴있거나 안개비가 내리는 조용한 [[새벽]]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새벽에 안개가 낀 상태에서 종묘 외대문의 매표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새벽부터 와서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일본인]]들이 맞이한다.  


참고로 이상하게 일본인들이 유독 한국인보다 종묘에 많이 오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 관광객들이 일본의 지역별 [[신사 (신토)|신사]]를 방문하고 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 최대 규모의 신사<ref>정확히는 사당이지만</ref>라고 할 수 있는 종묘에 많이 모이는 게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참고로 이상하게 일본인들이 유독 한국인보다 종묘에 많이 오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 관광객들이 일본의 지역별 [[신사 (신토)|신사]]를 방문하고 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 최대 규모의 신사<ref>정확히는 사당이지만</ref>라고 할 수 있는 종묘에 많이 모이는 게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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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로(神路)와 어로(御路) ==
== 신로(神路)와 어로(御路) ==
[[파일:신로.jpg]]<br />  
[[파일:신로.jpg]]<br>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끊고 외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이 걷는 길인 신로(神路)와 왕이 걷는 길인 어로(御路)가 있는데 원래 [[경복궁]]에서는 어로가 가장 높게 위치하지만 여기 종묘에서는 길이 2단 계단처럼 되어서 가장 높은 길이 신로이고 2번째로 높은 길이 어로이다. 이 신로는 왕도 함부로 밟아서는 안되었으며<s>어느 미친 왕이 선왕에게 노여움사서 천벌받으려고 신로를 밟을까</s> 이 [[암묵의 룰]]은 현재에도 이어져 신로에는 위 사진과 같이 신로를 밟지 말라고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로도 표기된 표지판이 놓여져 있고 현장학습 나온 철없는 꼬맹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신로 위로 걸어다니면 교사가 못하게 막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로 옆의 어로를 걸으면서 안개가 낀 종묘로 가는 길로 쭉 뻗은 신로를 보면 신비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끊고 외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이 걷는 길인 신로(神路)와 왕이 걷는 길인 어로(御路)가 있는데 원래 [[경복궁]]에서는 어로가 가장 높게 위치하지만 여기 종묘에서는 길이 2단 계단처럼 되어서 가장 높은 길이 신로이고 2번째로 높은 길이 어로이다. 이 신로는 왕도 함부로 밟아서는 안되었으며<s>어느 미친 왕이 선왕에게 노여움사서 천벌받으려고 신로를 밟을까</s> 이 [[암묵의 룰]]은 현재에도 이어져 신로에는 위 사진과 같이 신로를 밟지 말라고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로도 표기된 표지판이 놓여져 있고 현장학습 나온 철없는 꼬맹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신로 위로 걸어다니면 교사가 못하게 막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로 옆의 어로를 걸으면서 안개가 낀 종묘로 가는 길로 쭉 뻗은 신로를 보면 신비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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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전 앞에 펼쳐진 단도 진짜 넓은데 자세히 보면 중앙이 살짝 볼록하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가 내렸을 때 빨리 배출하기 위해서인데 맨 위의 사진을 보면 오른쪽 부분에 배수구(?) 비슷한 게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정전 앞에 펼쳐진 단도 진짜 넓은데 자세히 보면 중앙이 살짝 볼록하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가 내렸을 때 빨리 배출하기 위해서인데 맨 위의 사진을 보면 오른쪽 부분에 배수구(?) 비슷한 게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는 '''11칸'''의 건물이었다. 그런데 [[조선 영조|영조]] 때 왕이 계속 죽으면서 신주가 계속 늘어서(...) 종묘가 꽉 차게 되는 바람에 4칸을 증축면서 '''15칸'''으로 늘게 되었고 이후 [[조선 헌종|헌종]] 때 또 꽉 차서 또 4칸을 증축하면서 '''19칸'''이라는 미친 건물이 되었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8&cp_code=cp0237&index_id=cp02370011&content_id=cp023700110001&search_left_menu=</ref> 이렇게 건물을 증축하는 방식은 우리나라 건축 양식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방식이다. 종묘의 정전의 기둥들을 잘 보면 기둥마다 오래된 정도가 다른데 서쪽이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원래는 '''11칸'''의 건물이었다. 그런데 [[영조 (조선)|영조]] 때 왕이 계속 죽으면서 신주가 계속 늘어서(...) 종묘가 꽉 차게 되는 바람에 4칸을 증축면서 '''15칸'''으로 늘게 되었고 이후 [[헌종 (조선)|헌종]] 때 또 꽉 차서 또 4칸을 증축하면서 '''19칸'''이라는 미친 건물이 되었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8&cp_code=cp0237&index_id=cp02370011&content_id=cp023700110001&search_left_menu=</ref> 이렇게 건물을 증축하는 방식은 우리나라 건축 양식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방식이다. 종묘의 정전의 기둥들을 잘 보면 기둥마다 오래된 정도가 다른데 서쪽이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수복방===
===수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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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제정==
== 영녕전 ==
== 영녕전 ==
{{건축물 정보
{{문화재
|건물이름 = 종묘 영녕전
|명칭 = 종묘 영녕전
|원어이름 =  
|한자 = 宗廟 永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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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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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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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소유    = 국유
|수량= 1곽
|착공일  =
|면적 =
|개장일  =
|날짜 = {{날짜/출력|1985-1-8}}
|철거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종묘내부 (훈정동)
|건축    =
|시대 =조선시대
|설계    =
|소유 =국유
|건설    =
|관리 = 문화재청 종묘
|양식    =
|높이    =
|층수    =
|총면적  =
|대지면적 =  
|웹사이트 =  
|비고    =  
|하위 틀  =  
{{문화재 정보/삽입용
|종목    = [[보물 (문화유산)|보물]] 제821호
|지정일  = [[1985년]] [[1월 8일]]
|해제일  =  
}}
}}
}}
정전의 북서쪽에 자리한 건물로 왕조가 설립된 이후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입주자가 너무 많아질 것에 대비하여 지은 전각이다. {{ㅊ|정전을 무한정 길게 증축할 수도 있는데}}. 영녕전은 세종 3년(1421년) 정종(당시 공정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정전의 전각이 부족하여 지은 것으로 {{ㅊ|나라 창업한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 모자라?}} 처음에는 6칸짜리 건물이었으나 이쪽에다가 모시는 왕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여러 차례 확장공사를 거듭하여 현종 2년에 현재의 규모인 16칸짜리 건물로 변모하게 되었다.
정전의 북서쪽에 자리한 건물로 왕조가 설립된 이후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입주자가 너무 많아질 것에 대비하여 지은 전각이다. {{ㅊ|정전을 무한정 길게 증축할 수도 있는데}}. 영녕전은 세종 3년(1421년) 정종(당시 공정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정전의 전각이 부족하여 지은 것으로 {{ㅊ|나라 창업한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 모자라?}} 처음에는 6칸짜리 건물이었으나 이쪽에다가 모시는 왕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여러 차례 확장공사를 거듭하여 현종 2년에 현재의 규모인 16칸짜리 건물로 변모하게 되었다.  


본래. 역대 국왕의 신위는 창업주인 태조와 현직 국왕의 4대조,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생전 업적이 뛰어난 국왕과 왕비들의 신위는 정전에, 정전에서 옮겨진 국왕과 왕비, 새로이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시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국왕들은 불천위로 간주되어 정전에 모셔지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추존왕, 그리고 후사가 없어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 주로 정전에서 옮겨져 모셔졌다. 영녕전에 모셔진 대표적인 왕들로 정종, 문종, 단종, 인종, 명종, 경종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식이 없어 {{ㅊ|대를 잇지 못한 죄를 지은}}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다.
본래. 역대 국왕의 신위는 창업주인 태조와 현직 국왕의 4대조,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생전 업적이 뛰어난 국왕과 왕비들의 신위는 정전에, 정전에서 옮겨진 국왕과 왕비, 새로이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시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국왕들은 불천위로 간주되어 정전에 모셔지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추존왕, 그리고 후사가 없어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 주로 정전에서 옮겨져 모셔졌다. 영녕전에 모셔진 대표적인 왕들로 정종, 문종, 단종, 인종, 명종, 경종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식이 없어 {{ㅊ|대를 잇지 못한 죄를 지은}}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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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관람==
==종묘 관람==
한동안 종묘는 창경궁과 육교로 연결되어 있어서 창경궁을 관람하면서 자연스럽게 종묘까지 자유관람할 수 있는 코스가 있었으나 [[2010년]] [[5월 10일]]부로 폐쇄되면서 정문인 외대문(외삼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종묘는 창경궁과 육교로 연결되어 있어서 창경궁을 관람하면서 자연스럽게 종묘까지 자유관람할 수 있는 코스가 있었으나 {{날짜/출력|2010-5-10}}부로 폐쇄되면서 정문인 외대문(외삼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제 관람===
===시간제 관람===
기본적인 종묘 관람은 시간제 관람이 원칙이다. 1회 최대 300명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문화재청의 종묘관리소 홈페이지에서 관람예약을 하거나 현장에서 관람권을 구매해야 한다. 참고로 예약 후 별도의 연락없이 입장시간 10분 전까지 표를 사지 않을 경우에는 관람예약은 자동 취소된다 참고로 홈페이지로 예약했을 경우 매표소에서 예약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또한 외국어 안내 시간에는 외국인을 동반하지 않은 내국인은 입장이 불가능하다. 관람 시간은 대략 1시간 내외로 소요된다.
기본적인 종묘 관람은 시간제 관람이 원칙이다. 1회 최대 300명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문화재청의 종묘관리소 홈페이지에서 관람예약을 하거나 현장에서 관람권을 구매해야 한다. 참고로 예약 후 별도의 연락없이 입장시간 10분 전까지 표를 사지 않을 경우에는 관람예약은 자동 취소된다 참고로 홈페이지로 예약했을 경우 매표소에서 예약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또한 외국어 안내 시간에는 외국인을 동반하지 않은 내국인은 입장이 불가능하다. 관람 시간은 대략 1시간 내외로 소요된다.


===자유 관람===
===자유 관람===
매주 [[토요일]] 및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별도의 예약 없이 자유관람이 가능한 날이다.
매주 [[토요일]] 및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별도의 예약 없이 자유관람이 가능한 날이다.  


==같이 보기==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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