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갑오개혁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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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갑오개혁'''은 [[제1차 갑오개혁|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1894년 12월 17일부터, '''박영효'''가 왕궁 침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실각한 1895년 7월 6일까지의 기간에 조선에서 진행된 [[개혁]] 조치들을 말한다.
* 상위 항목 : [[갑오개혁]]
 
'''제2차 갑오개혁'''은 [[제1차 갑오개혁|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1894년 12월 17일부터, '''박영효'''가 왕궁 침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실각한 1895년 7월 6일까지의 기간에 조선에서 진행된 개혁 조치들을 말한다.


== 제2차 갑오개혁의 배경 ==
== 제2차 갑오개혁의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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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초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친일 정권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 당시의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입각하도록 하려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은 여전히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정변의 주동자들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박영효는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정권인 1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천에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한편 당초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친일 정권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 당시의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입각하도록 하려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은 여전히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정변의 주동자들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박영효는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정권인 1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천에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이같은 상황은 9월 16일 평양전투를 계기로 반전되어,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박영효를 입각시키려는 일본 이노우에 공사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월 9일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의 주동자들을 사면함에 따라 박영효 등 갑신파 인물들이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 혹은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출범한다.<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20&position=-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ref>
이같은 상황은 9월 16일 평양전투를 계기로 반전되어,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박영효를 입각시키려는 일본 이노우에 공사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월 9일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의 주동자들을 사면함에 따라 박영효 등 갑신파 인물들에게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 혹은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출범한다.<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20&position=-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ref>
=== 정권의 성격 ===
=== 정권의 성격 ===
1894년 10월 15일 부임한 이노우에 공사는, 전임 오오토리 공사가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키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취해놓고서도 정세를 관망하며 소극적 방관 정책을 취했던 것과 달리, 청일전쟁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보호국화를 시도했다.
1894년 10월 15일 부임한 이노우에 공사는, 전임 오오토리 공사가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키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취해놓고서도 정세를 관망하며 소극적 방관 정책을 취했던 것과 달리, 청일전쟁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보호국화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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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의 내용 ==
== 개혁의 내용 ==
2차 갑오개혁 기간 동안에 추진된 개혁 조치들은 크게 삼국간섭 이전 이노우에 공사의 주도로 추진된 것(정부기구 개편 등)과,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한 기간에 박영효 내각이 추진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F>분류 정리 필요</REF>
=== <홍범 14조> 반포 ===
=== <홍범 14조> 반포 ===
고종은 1895년 1월 7~8일 14개 조로 이루어진 '홍범(洪範)'을 발표한다. 이 홍범은 갑오개혁의 방향을 천명한 정책 지침으로서,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순 한글 · 국한문 혼용 · 순 한문의 세 가지 형태로 발표되었다. 홍범은 박영효가 주도하여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전문은 다음과 같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30_0010&position=-1 <홍범 14조의 반포>]</ref>
고종은 1895년 1월 7~8일 14개 조로 이루어진 '홍범(洪範)'을 발표한다. 이 홍범은 갑오개혁의 방향을 천명한 정책 지침으로서,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순 한글 · 국한문 혼용 · 순 한문의 세 가지 형태로 발표되었다. 홍범 전문은 다음과 같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30_0010&position=-1 <홍범 14조의 반포>]</ref>


{{인용문|홍범 14조
{{인용문|홍범 1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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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람을 쓰되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선비를 구함에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등용의 길을 넓힐 것.<ref>≪高宗實錄≫, 고종 31년 12월 12일</ref>}}
14. 사람을 쓰되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선비를 구함에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등용의 길을 넓힐 것.<ref>≪高宗實錄≫, 고종 31년 12월 12일</ref>}}
=== 대외 관계 관련 ===
=== 대외 관계 관련 ===
* 왕실 존칭이 격상되었다. 왕에 대한 존칭이 기존의 '주상 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되었고, 왕비와 세자에 대한 존칭도 그에 맞춰 각각 격상되었다.
* 왕실 존칭이 격상되었다. 왕에 대한 존칭이 기존의 '주상 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되었고, 왕비와 세자에 대한 존칭도 그에 맞춰 각각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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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국기무처를 중추원에 통합, 실권 없는 자문기관으로 격하
* 군국기무처를 중추원에 통합, 실권 없는 자문기관으로 격하
* 궁내부를 설치하여 내각과 분리 (1894년 12월 17일)
* 궁내부를 설치하여 내각과 분리 (1894년 12월 17일)
** 궁내부 산하에, 왕실 경비를 취급하는 회계원(會計院)과 별도로 왕실 사유재산을 운용하는 내장원(內藏院)을 두어 왕실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이는 1차 개혁에서 왕실 재정까지도 탁지부에서 관할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 궁내부 산하에, 왕실 경비를 취급하는 회계원(會計院)과 별도로 왕실 사유재산을 운용하는 내장원(內藏院)을 두어 왕실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 지방행정제도 개편 ===
=== 지방행정제도 개편 ===
기존의 조선 지방행정 체계는 8도(道), 5유수부(留守府), 3감리서(監理署), 목(牧)-군(郡)-현(縣) 등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박영효는 내부대신으로서 1895년 1월 초에 지방행정제도 개편을 시도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박영효 자신이 독자적으로 실권을 장악했던 시기인 1895년 6월에 이르러 실제로 개편을 단행한다. 박영효는 새로 설치된 23부의 관찰사 자리에 자파의 인물을 대거 임용하여 자기 정권의 개혁 추진 동력으로 삼았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30_0040&position=-1 <지방행정제도의 개혁>]</ref>
기존의 조선 지방행정 체계는 8도(道), 5유수부(留守府), 3감리서(監理署), 목(牧)-군(郡)-현(縣) 등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박영효는 내부대신으로서 1895년 1월 초에 지방행정제도 개편을 시도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박영효 자신이 독자적으로 실권을 장악했던 시기인 1895년 6월에 이르러 실제로 개편을 단행한다. 박영효는 새로 설치된 23부의 관찰사 자리에 자파의 인물을 대거 임용하여 자기 정권의 개혁 추진 동력으로 삼았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30_0040&position=-1 <지방행정제도의 개혁>]</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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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관이 환정(還政)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명시하여 수세권 제한
** 지방관이 환정(還政)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명시하여 수세권 제한
** 지방재판소를 설치하여 재판권 분리
** 지방재판소를 설치하여 재판권 분리
=== 경제 개혁 ===
* <회계법(會計法)> 발표(1895년 4월 24일)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예산제도, 조세법정주의 등 규정
** 조세법정주의 규정 : 조세를 신설하거나 세율을 변결할 때는 반드시 법률로 정하도록 하여, 법적 근거가 없는 요역(徭役) 등의 징발을 금지함
** 회계연도를 정의하여, 매년 탁지부에서 예산안을 작성해서 각료회의에서 심의를 받도록 함
** <회계법>은 초기에 중앙 정부에서만 시행하다가,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1895년 6월 23일부터 전국 확대 실시
* 인삼 전매제 실시
* 일반인의 사금 채광 허가
* 광세 징수제도 정비 : 징세 권한을 지방관으로부터 분리하여 체계화
* 육의전(六矣廛) 및 공납(貢納)제도 폐지
=== 군사 개혁 ===
* 통위영·장위영·총어사·경리사·호위청 폐지 (1894년 12월 17일)
* 훈련대(訓練隊) 창설 (1895년 1월)
* 박영효는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근대적 상비군을 창설하려 시도했다.
** 훈련대의 규모를 기존 2개 대대에서 6개 대대로 확장하여 약 3,000명의 병력을 주요 도시에 배치 계획
** 신설대(新設隊)를 창설하여 공병대 8개 부대, 경·중보병 2개 부대, 기병 2개 부대 등 4,800명 규모로 운영하려던 계획
** 3개월 과정의 훈련대 사관 양성소(訓練隊士官養成所) 창설 계획
* 지방군제 개혁 시도 : 8도의 감영과 감사가 폐지되어 지방군이 해산되었고, 봉수 체계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박영효의 망명으로 이후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중단되었다.
=== 경찰 제도 개혁 ===
1차 갑오개혁 당시 설치된 경무청을 확대하여, 근대적으로 무장하고 편제된 대규모의 경찰력을 확보하여 개혁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다. 경무부사(警務副使)를 감축하고 경무관·총순을 확충하였으며, 경찰관(순검)들을 서양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훈련하였다. 1895년 7월 초까지 내부대신 휘하에는 최소 670명의 경찰 병력이 있었다.
=== 사법 제도 개혁 ===
* 사법권을 행정부로부터 분리
** 법무아문 산하의 의금사(義禁司)를 '법무아문 권설(임시) 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로 개칭하여 재판과 행형 사무 일체를 재판소로 이임 (1895년 1월 11일)
** <재판소 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사법권 분리 (1895년 4월 19일)
* 판사·검사 등 사법관 직제 확립
* 법관양성소 설치
=== 교육제도 개혁 ===
정동파(친미파)인 박정양, 이완용,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교육제도 개혁이 추진되었다.
*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 반포 (1895년 2월 26일)
* 한성사범학교 개교 (1895년 5월 24일)
* 외국어학교 개교 : 1895년부터 1898년까지 서울과 인천 등지에 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독일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각각 설립
* 갑신정변 이후 중지되어 있었던 해외 유학생 파견을 재개 : 도쿄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경응의숙)에 매년 일정 인원을 입학시키는 협약 체결
=== 기타 ===
* 조선협회 창설 : 근대적 정당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준정치단체의 성격
* 전통적 백색 복식 대신 서양식 흑색 위주의 복식을 보급
* 갑신정변 등에 연루된 정치범 복권
== 제2차 갑오개혁의 종료 ==
실권을 장악한 박영효는 1895년 5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군과 경찰 조직•지방행정 조직의 개편에 주력했다. 권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박영효는 6월 25일 왕실 경호 업무에 자신이 지휘하는 훈련대를 투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는데, 이 사건은 대원군 실각 이후 다시금 권력을 회복하려 하던 왕비 민씨 세력이 박영효와 충돌하고 있었던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왕실 경비대 교체 건의가 거절당하자 박영효는 무력으로 왕실을 장악해서 통제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박영효 내각에서 권력을 잃은 김홍집 등 갑오파가 민씨에게 협조하여 박영효를 몰아내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30_0010&position=-1 <제3차 개혁의 배경>]</ref>, 박영효가 실제로 훈련대를 동원하여 민씨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박영효 스스로는 그러한 음모를 꾸민 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다고 하며, 이노우에 공사가 서울을 떠나 있는 동안 대리로 업무를 맡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대리공사는 박영효가 실제로 '과격한 행동'의 계획을 세웠으나 자신이 만류하여 철회했다고 주장했다.
1895년 7월 7일 박영효는 궁정회의에서 '불궤(不軌) 음모'의 혐의로 자신을 체포할 것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기무라 대리공사 등의 협조를 얻어 일본으로 2차 망명길에 오른다. 이에 따라 박영효 내각은 붕괴하고 2차 갑오개혁은 마무리된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20&position=-1#480_comment <제2차 개혁의 추진세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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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사]]
[[분류:한국사]]
[[분류: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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