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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해산.png|섬네일]] | [[파일:전해산.png|섬네일]] | ||
全海山.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全海山.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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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0월.}} | 무신 10월.}} | ||
위 격문은 1908년 10월에 영산포 일본 헌병분대장에게 보낸 글로, 인륜의 회복을 통해 천도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당시에 인륜이 상실되고 분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 위 격문은 1908년 10월에 영산포 일본 헌병분대장에게 보낸 글로, 인륜의 회복을 통해 천도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당시에 인륜이 상실되고 분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현실을 지적했다. 그 중 특히 일본 헌병대에서 임시로 고용해서 쓰고 있는 헌병보조원들의 만행을 지적하며 이들을 잘 훈련시켜 의병진으로 복귀시킬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 ||
1909년 3월, 호남동의단은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 직면해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했고, 의병대의 사기는 급격하게 저하되어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여기에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 활동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 1909년 3월, 호남동의단은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 직면해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했고, 의병대의 사기는 급격하게 저하되어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여기에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 활동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