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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렸던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남매도, 법으로 규정된 기준보다 더 많은 재산과 시종들을 소유했다. 인목왕후는 동궁전([[광해군]])의 시종들을 빼내어 공주와 대군의 처소에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영창대군의 의복을 세자처럼 입히기도 했고, 중궁전 소속 시종들이 자신의 위세를 믿고 동궁전 시종들을 방자하게 대해도 제대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목왕후와 연안 김씨 가문에도 위기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 아직 어렸던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남매도, 법으로 규정된 기준보다 더 많은 재산과 시종들을 소유했다. 인목왕후는 동궁전([[광해군]])의 시종들을 빼내어 공주와 대군의 처소에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영창대군의 의복을 세자처럼 입히기도 했고, 중궁전 소속 시종들이 자신의 위세를 믿고 동궁전 시종들을 방자하게 대해도 제대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목왕후와 연안 김씨 가문에도 위기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 ||
광해군이 즉위하고 5년이 지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 광해군이 즉위하고 5년이 지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김제남과 그의 아들 3명은 ‘왕(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 오빠, 남동생들을 모두 잃은 인목왕후는 큰 충격에 빠졌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이듬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영창대군은 고작 8살이었다.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도 대비와 [[공주]]의 지위를 잃고 서궁(西宮){{ㅈ|오늘날의 [[덕수궁]].}}에 유폐되었으며, 그곳에서 모녀는 오랫동안 감시 속에서 불안하며 곤궁한 생활을 했다. | ||
== 인조반정 == | == 인조반정 == | ||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인목왕후와 |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인생도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광해군]]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그 일가를 폐위하고 능양군(綾陽君)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1595년에 태어난 능양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5남인 정원군(定遠君){{ㅈ|훗날 ‘원종(元宗)’으로 추숭됨.}}의 장남이다. 즉 인목왕후와는 할머니-손자, 정명공주와는 고모-조카 관계가 된다. 또한 인목왕후의 형부 심정세(沈挺世)는 능양군의 이종사촌 형이다. | ||
반정세력이 서궁(덕수궁)을 찾아오자 처음에 인목왕후는 믿지 못했지만, 곧 사태를 파악하고 안도하는 한편 광해군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반정세력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인목왕후에게 | 반정세력이 서궁(덕수궁)을 찾아오자 처음에 인목왕후는 믿지 못했지만, 곧 사태를 파악하고 안도하는 한편 광해군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반정세력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인목왕후에게 “광해군을 폐위하는 교서(敎書)를 써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녀는 “광해와 세자를 이리로 끌고 오라. 내가 직접 그들 부자(父子)의 머리를 잘라 (아버지, 오빠, 남동생들, 아들에게) 제사를 지내겠다. 그들의 살점을 씹기 전에는 교서를 쓸 수 없다.”며 분노를 그치지 않았다. | ||
광해군은 반정세력에 의해 서궁의 석어당(昔御堂)으로 끌려왔고, 그곳에서 인목왕후는 광해군을 폐위하는 사유를 구구절절 열거하여 작성한 교서를 읽었다.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능양군이 새 국왕([[조선 인조|인조]])로 즉위했고, 인목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궁중에 복귀했다. | 광해군은 반정세력에 의해 서궁의 석어당(昔御堂)으로 끌려왔고, 그곳에서 인목왕후는 광해군을 폐위하는 사유를 구구절절 열거하여 작성한 교서를 읽었다.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능양군이 새 국왕([[조선 인조|인조]])로 즉위했고, 인목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궁중에 복귀했다. | ||
한편 어머니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어 혼기를 놓쳤던 정명공주는 3살 연하의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ㅈ|신분이 높은 여자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 | 한편 어머니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어 혼기를 놓쳤던 정명공주는 3살 연하의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ㅈ|신분이 높은 여자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했으며, 7남 1녀를 낳고 82세까지 장수했다. 정명공주의 후손으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와 정조의 신하 홍국영(洪國榮) 등이 있다. | ||
== 대왕대비 시절과 죽음 == | == 대왕대비 시절과 죽음 == | ||
인목왕후는 이후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부처님께 아들과 아버지와 형제들의 명복을 빌었다. [[경기도]] [[안성시|안성]]의 칠장사(七長寺)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願刹){{ㅈ|시주자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 또는 사찰.}}로 삼았으며,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아들과 아버지의 위패를 모셔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 인목왕후는 이후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부처님께 아들과 아버지와 형제들의 명복을 빌었다. [[경기도]] [[안성시|안성]]의 칠장사(七長寺)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願刹){{ㅈ|시주자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 또는 사찰.}}로 삼았으며,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아들과 아버지의 위패를 모셔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 ||
또한 오랫동안 유폐 생활을 했던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정치]]에도 종종 관심을 보였고, [[한글]]로 | 또한 오랫동안 유폐 생활을 했던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정치]]에도 종종 관심을 보였고, [[한글]]로 교서를 써서 내리기도 했다.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즉위 명분인 할머니 인목왕후와 고모 [[정명공주]]를 각별히 받들었다. | ||
1632년, 인목왕후는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그녀의 증상들로 보면, [[갑상선]] 질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평생의 경쟁자이자 원수였던 [[광해군]]을 폐위시켜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어 나름대로 통쾌한 복수를 했지만, 정작 병을 얻어 앓다가 광해군보다 먼저 사망했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1641년에 세상을 떠났다. | 1632년, 인목왕후는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그녀의 증상들로 보면, [[갑상선]] 질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평생의 경쟁자이자 원수였던 [[광해군]]을 폐위시켜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어 나름대로 통쾌한 복수를 했지만, 정작 병을 얻어 앓다가 광해군보다 먼저 사망했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1641년에 세상을 떠났다. | ||
인목왕후의 묘지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목릉(穆陵)이다. 인근에는 선조와 의인왕후의 묘지도 있으며, 조선왕조의 여러 왕과 왕비들의 무덤들이 많다. 이 일대를 동구릉(東九陵)이라고 하며, 사적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인목왕후의 묘지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목릉(穆陵)이다. 인근에는 선조와 의인왕후의 묘지도 있으며, 조선왕조의 여러 왕과 왕비들의 무덤들이 많다. 이 일대를 동구릉(東九陵)이라고 하며, 사적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 ||
== 서예 == | == 서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