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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속한 고성 이씨 가문은 조선 전기에는 지속적으로 현관을 배출한 유력 가문이었지만, 조선 후기 노론이 집권한 후에는 남인에 속한 그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성 이씨 가문은 안동의 유력한 사족으로서, 학문 및 혈연간의 유대를 강화했으며, 혼인을 통해 인근의 유력한 양반 가문과의 결속을 강하게 형성했다. | 1858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속한 고성 이씨 가문은 조선 전기에는 지속적으로 현관을 배출한 유력 가문이었지만, 조선 후기 노론이 집권한 후에는 남인에 속한 그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성 이씨 가문은 안동의 유력한 사족으로서, 학문 및 혈연간의 유대를 강화했으며, 혼인을 통해 인근의 유력한 양반 가문과의 결속을 강하게 형성했다. | ||
가령 이상룡의 조부 이종태(李鍾泰)는 의성 김씨 종손인 김진화(金鎭華)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다. 또한 이종태의 누이는 [[ | 가령 이상룡의 조부 이종태(李鍾泰)는 의성 김씨 종손인 김진화(金鎭華)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다. 또한 이종태의 누이는 [[김도화]]에게 시집갔고, 이상룡의 부친 이승목은 안동 권씨 권진하(權鎭夏)의 딸과 결혼해 이상룡을 낳았다. 따라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권세연]]은 이상룡의 외숙부이다. 이렇듯 의성 김씨 및 안동 권씨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에, 이상룡이 거주하는 임청각에는 경상도 일대의 이름 높은 유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상룡은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김흥락(金興洛)이었다. | ||
김흥락은 [[이황]], [[김성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는 퇴계 학통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이상룡은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동문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그는 퇴계학설을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별하는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을 지지했으며, 사단칠정론에 있어서도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원리적으로 구별하는 입장을 취했다. | 김흥락은 [[이황]], [[김성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는 퇴계 학통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이상룡은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동문들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그는 퇴계학설을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별하는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을 지지했으며, 사단칠정론에 있어서도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원리적으로 구별하는 입장을 취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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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 [[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 ||
[[분류:안동시 출신]] | [[분류:안동시 출신]] | ||
[[분류: | [[분류:1858년 출생]] | ||
[[분류:1932년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