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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 가계와 대한제국기 === 1880년 6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부친 이병두와 모친 [[경주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 이씨]]이고, 자는 자선(君善), 호는 자오(池吾)이다. 영의정에 추증된 공도공 이문화의 19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공신이 된 태엄공 이주의 11대손이다. 그는 [[대구 서씨]] 서상조의 딸과 혼인하여 1897년 이재화, 1900년 이재태를 낳았다. 부인 서씨가 1909년 8월 28살의 나이로 사망한 뒤, 두 아들은 외가에 맡겨졌다. 이후 [[한양 조씨]] 조홍세의 딸과 재혼하였고, 1916년 맏딸 이재원, 1922년 맏아들 이재춘, 1926년 차남 이신원, 1929년 삼남 이재우, 1934년 둘째 달 이단원을 낳았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 조훈이 그의 처남이다. 부친 이병두는 한약업에 종사했으며, 1908년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대구지회의 찬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중산층에 속해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경제력을 보유했다. 이경희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 고향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이후 한성부로 상경하여 1908년 6월 20일에 설립된 기호학교의 중등교육과정인 본과에 입학하여 우등상을 수상하고, 1909년 2학년으로 진급하여 그해 7월 여름 방학식에서 우등상을 수상했다. 이경희는 기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08년 3월 서울 보광학교에서 열린 총회에 참여하여 교남교육회에 가입했다. 교남교육회는 경북의 부호 장길상의 집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교육으로써 변화해 가는 세계에 대처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교남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지방에는 지회와 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교남교육회는 회보로 <교남교육회 월보>를 발행하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학교 설립과 유지를 지도했다. 1908년 9월 대구에서 결성된 달성친목회에도 가입했다. 달성친목회는 이근우, 김용선 등이 주축이 되어 청년층의 친목도모와 교육, 실업의 장려를 목표로 달성되었다. 달성친목회는 대한협회대구지회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비밀리에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달성친목회는 교남교육회로부터 "교육과 친목이 그 이름은 다르나 장려하는 것은 같다"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고, 1909년 달성친목회 제1회 창립기념식에 교남교육회의 [[남형우]]와 이원식이 교육시찰위원으로 참석했다. 남형우는 이 자리에서 <요육과 오인의 생명>이란 주제로 연설했다. 달성친목회는 회관에 법률야학강습소를 설치하고, 보성법률학교의 강의록을 교재로 하여 그대 법률을 강의했다. 또 협성학교 내에 계절학교 형태의 하기강습소를 설치하여, 영남지역 각 군의 학생 200여 명을 대상으로 역사와 이화학을 가르쳤다. 또한 달서여학교가 학생이 짧은 시간에 많이 불어나면서 교실이 비좁아 불편해지자 달성친목회 회관을 빌려줌으로써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줬다. 이경희는 대구에 소재한 사립 협성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했다. 협성학교는 사립 중등학교로서, 낙육재와 양사재의 소유재산을 기본으로 하여 재원을 마련하면서도, 신축 교사 비용과 운영에 드는 소요 예산은 지역 유지의 협조를 받았다. 협성학교는 대한합혀 대구지회와 학교 임원 선정 및 운영에 관해 상호 협의하였고,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서상하가 협성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이경희는 1909년 10월 [[안희제]], [[서상일]], [[남형우]], 이원식 등이 조직한 대동청년단에 참여했다. 대동청년단은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였으며, 군자금 모금과 인재 육성,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과의 연락을 목적으로 활동한 비밀결사였다. 또한 그는 1909년 8월 창립한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가 창립한 단체로, 청년층이 국권 회복운동의 핵심세력이 되어야 하며 장래 나라와 겨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이경희는 이 단체에서 백영은, 장도순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 한성연회의 검찰원으로 활동했다. 청년학우회의 [[이회영]], [[이동녕]], 이규봉 등과 한성연회의 장도순 등이 [[한일병합]] 이후 서간도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을 때, 이경희도 그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이 부족하여 확실하지 않다. === 일제강점기 === 1910년대 이경희의 행적은 기록이 부족하여 파악하기 어렵다.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만주 심양에서 달신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또한 두만강 대안 지방(십팔도구 내신개)에 있는 창신학교의 교사에 '이경희'란 이름이 있다. 다만 중간 이름의 한자가 달라서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또한 유족은 이경희가 무송현에서 둔전을 개발하여 군자금을 조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운동 전선에 내보낼 계획을 추진했다고 증언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없다. 1915년에서 1916년 사이 [[이동휘 (1873년)|이동휘]], [[이종호]], [[장기영]] 등이 중국 왕청현 나자구 한인촌에 독립군 사관 양성학교로 세운 동림무관학교에 학도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학교는 중국 당국이 한인의 민족교육을 중국 체제에서 운용하려고 반포한 <획일간민교육변법>에 따라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로 불렸는데, 이 변법에 기재된 학교 학도 명단에 이경희의 이름이 있다. 다만 명단에는 29세로 되어 있는데, 실제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경희는 1920년 무렵 경성의 안국동에 거주하면서 1920년 4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조선노동곤제회는 조선 노동자의 지식계발과 인격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였다. 그는 1921년 3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조직의 예비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경성본회 대표자 61인 중 한 명이었으며, 조선노동공제회의 의사원으로도 활동했따. 그해 7월 15일 경성 관수동에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이 개업했을 때 이사로 활동했다. 소비조합은 처음에는 미곡만 판매하고 추후에는 모든 일용물품을 취급할 계획을 세웠다. 1922년 2월 이원식, 윤명은, 오상근<ref>[[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오상근]]과 동명이인이다</ref>, [[문일평]] 등 20명과 함께 단연동맹회를 결성했다. 단연동맹회는 담배를 끊는 것이 생활 개선에 도움을 주며, 담배를 사지 않아 모은 돈으로 장학금이나 사회 여러 방면에 사용되길 희망하는 차원에서 결성되었다. 단연운동은 1923년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22년 12월 김제 단연동맹회, 1923년 1월 은율단연동맹회와 숙천 금주단연동맹회, 1923년 2월 군산 단연동맹회와 진주 여자단연동맹회, 평택 봉남리 단연동맹회, 1923년 3월 옥천 단연동맹회, 과천 단연동맹회, 용정지 금주단연동맹회, 성천 삼홍면 금주단연동맹회, 함평 금주단연동맹회, 보성 금주 단연동맹회, 1923년 4월 영변 금주단연동매오히, 1923년 5월 강계 금주단연동맹회 등 각지에서 단연동맹회가 잇달아 설립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의열단]]의 국내에서의 의열 활동에 관여했다. 1923년 3월 15일, 그는 [[황옥]] 경부의 집에서 <조선혁명선언서> 1책,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문서 100장을 전달받았다. 그는 황옥으로부터 문서를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우송하고, 나머지는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에 뿌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경성에서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우송하여 의열단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의열단의 활동이 발각되는 바람에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ref>[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44&evntId=0034974914&evntdowngbn=Y&indpnId=000000708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f> 1924년 5월 25일, 이경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다. [[동아일보]] 1923년 7월 22일 기사는 이경희의 부인 한양 조씨의 정성어린 옥바라지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인용문2|가족은 철창 밑에 가족들은 주럼에 울고 있는 의열단원의 가정. 차마 못 볼 일. 이경희 가족. 조선독립혁명선언서의 다수한 문서를 각 관공서에 대담하게 대부를 하고 황옥과 함께 옥ㅇ자리에 세상과 등을 진 이경희의 가족은 또 얼마나 비참한 생애를 하는가. 그 부인 조씨는 본시 서간도에서 살은 여사로 이경희가 조선에서 망명하여 간도 지방으로 표류를 하며 조선 독립을 촉진하기에 노력하는 중에 부부가 되어 인원(8)이라는 딸과 작년에 낳은 재춘이라는 아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던 것이다. 부부는 그간 경성에 돌아와 안국동 10번지 아래 방 한 칸을 매삭 6원에 얻어서 근근히 지내이며 이경희는 생도를 구하고자 홍정의술원을 다니랴고 설비에 착수까지 하여 놓고 마침내,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피고는......"하는 죄목을 입고 황옥과 같이 철창 하에 눕히게 되고 만 것이었다. 가뜩이나 조반석죽도 여의치 못하던 집안에 하늘과 같이 믿던 남편이 산지옥으로 끌려 나가고 마니 외로이 떠러진 조씨는 어린 자식 남매를 데리고 넓은 천지에 다시 바라고 향할 곳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옥중의 가장을 위하여 모든 붓끄럼과 염치없음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는 굶고 아이들은 주려가면서라도 어린 아들은 업고 인원이는 걸어가면서 각 처로 지천을 찾아다니며 ㅇㅇㅇ의 ㅇ성하여져서 하는 수 없이 사식을 중지할까 하는 생각조차 여러 번 들어갔으나 옥중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이의 처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워 누구에게든지 염치없는 동정을 청할 용기가 나게 된다 한다. 남편 면회를 하러 다니는데도 오전의 차비조차 군졸하야 동소문 안에서 독립문 막바지까지 걸어서 왕래를 하느라고 등에 업힌 어린 아이의 고운 얼굴을 무참히도 검게 타고 말았으니 그 열을 대하고 애를 끓은 이가 다만 그 어머니뿐일는지.}} 출옥 후 서울 종로 6정목에서 정양을 취하다 1927년 6월 [[신간회]] 지회를 설립하기 위해 [[송두환(독립운동가)|송두환]], [[최윤동]] 등과 몇 차례의 예비 모임을 가졌다. 그해 7월 23일 교남기독청년회관 상층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치 준비회를 개최했고, 이경희를 비롯한 20여 명이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준비위원들은 이경희를 비롯한 민족주의 좌파와 장적우, 김리룡, 장하명 등 사회주의 계열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중심으로 대구상공협회를 결성하고 조선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7년 9월 3일 조양회관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경희는 이 대회에서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신간회 대구지회 회장의 자격으로 활동했다.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 당시 회원 수는 약 150명 정도였다. 대구지회는 달성군 화원면과 옥포면에 화포분회를 설치하였고, 달성군에 6개의 노동야학을 운영하거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실시하였으며,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사상강좌회를 개최하여 학생층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활동을 수행했다. 특히, 사상강좌회를 통해 대구고보에 적우동맹 등 학생비밀결사가 조직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1928년 대구지역 동맹휴교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27년 10월 16일 조선경제연구회를 결성할 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가 대구 지역 여론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구청년동맹은 경제연구회에 대해 "취지를 검토한 결과 운동선을 혼란시키는 반동단체 혹은 이류단체였다"라고 규탄하며, 반대 궐기문을 작성하여 대구시내 각 사회단체 연합대책강구회의 소집을 결의했다. 또한 신간회 대구지회도 "모든 민중이 단일당의 기치 밑에 모여들어야 하는데, 경제연구회란 것을 조직하는 건 상대적 혹은 반동적이니 양해할 필요가 없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이경희는 회장을 계속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927년 12월 신간회대구지회 제1회 정기대회에서 회장직을 부회장 최윤동에게 넘겨주고 일반 회원이 되었다. 이후 1928년 재정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회복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하여 [[안희제]], [[최윤동]], [[김관제]] 등과 함께 [[서상일]]에게 중외일보 발기인 및 2백주 규모의 주식 인수를 청했지만, 서상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했다. 이에 이경희 등은 "서상일은 자치주의자요 우경사상가이며, 발기 초에는 냉담하다가 1년 간 피와 땀으로 설립한 기성사업을 계획적으로 횡령, 탈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1928년 11월 11일에는 밀양경찰에 의해 검속당했다. 밀양에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를 지도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경희가 밀양에 내려온 실제 이유는 밀양에 살면서 건강이 악화된 딸 이인원의 병문안 때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곧 풀려났다. 1929년 신간회 본부는 공석이 된 총무 간사 및 간사를 보선했다. 이때 이경희는 이옥, [[오화영]], [[조병옥]] 등과 함께 총무 간사로 선출되었다. 또 1929년 신간회 정기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준비위원회에서 서무부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가 해산된 후에는 대외 활동을 중단했다. 1939년 7월 12일 [한용운]]의 회갑연에 참여하였으며, [[태평양전쟁]] 전후 일제 당국으로부터 [[창씨개명]] 요구를 받았으나 끝내 거부하고 1942년 여름 대구의 야산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 해방기 === [[8.15 광복]] 후, 이경희는 1945년 8월 16일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서상일]], [[백남채]], [[배은희]], 엄성문, [[서동진]], [[장인환(1897)|장인환]], 이재영, 송기찬, [[정운일]] 등과 함께 치안을 유지할 단체 결성에 합의했다. 이들은 8월 17일 대구일일신문사에서 경북치안유지회를 결성했고, 서상일을 대표로 선출한 뒤 8월 18일 공회당에서 정총대 회의를 열어 협력을 요청하였다. 경북치안유지회는 8월 22일 앞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회와 합동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로 개편되었다. 위원장엔 [[김관제]], 부위원장엔 백남채가 선출되었다. 이후 상경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경희는 1945년 9월 우익 계열이 조직한 국민대회준비회에 참가해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1945년 10월 18일 결성된 경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 후보에 올랐지만, 이경희가 서울에 계속 머물며 정치 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된 데다 중도 내지 우익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1945년 12월 [[미군정]]의 경상북도 부지사로 추천받았다. 경북도군정 도지사 레이몬드 제노스키 대령은 이경희에게 경북부지사 위촉편지를 보냈다. {{인용문2|존경하는 이형 몇 마디 말씀을 드리게 됨을 기뻐합니다. (중략) 도 고문회의가 12월 20일 21일 양일간 개최됐는데 (중략) 귀하를 조선인 지도자로서 본관에게 천거하였기에 본관은 이에 (중략) 민정관, 즉 본도 부지사의 사무와 직책을 귀하에게 위임토록 아놀드 장군에게 추천합니다. 금일 (중략) 본관 사무실에서 귀하의 내방을 맞았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경희는 추천을 승낙하였고 1946년 1월 경상북도 부지사에 정식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해 2월 초 초대 대구부윤으로 부임했으며, 1946년 3.1 운동 기념식에서 미군정청 대구부를 대표하여 인사 말씀을 진행했다. 그는 식량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식량문제의 자주해결이야 말로 자주독립 능력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라는 호소 담화를 발표하였다. 3월 11일 대구에서 첫 기아 데모가 일어나 수백명이 대구부청에 몰려 데모를 벌이자, 이경희는 부부윤 권영세, 농상과장 허흡, 후생과장 이건영 등과 긴급회의를 열고 임시조치를 마련했다. 각 정회장으로부터 극빈자란 증명을 받아오면 한 사람 당 쌀 한 되, 잡곡 한 되씩을 긴급 배급하기로 15일로 예정된 임시배급도 12일부터 주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 정도 조치로도 멈추지 않고 1946년 4월 1일 대구부청 앞에서 두 번째 기아 데모를 벌였고, 1946년 7월 1일 또다시 대구부청 앞에 수천 명이 집결하여 3차 시위를 벌였다. 이경희는 경북도청으로 달려가서 대책을 논의했으나 마땅한 해결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식량문제에 대처하는 미군정의 정책에 한계를 느꼈고 식량 위기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마련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끼고 대구 부윤을 사직했고, 부부윤 권영세가 1946년 7월 5일부로 대구부윤에 취임했다. 1946년 3월 9일 조선독립경북독립촉진회와 조선신탁반대국민총동원 경북위원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경북국민회의 지부장이 되었으며, 1947년 무렵 경북독촉국민회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신탁통치]]에 적극 반대하거나 좌익과 갈등을 벌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설립 후, 이경희는 1949년 7월 남선경제신문<ref>[[매일신문]]의 전신</ref>의 사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1949년 12월 4일 대구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유해는 대구시 무태 동변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가람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이경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분류: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각주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인용문2 (원본 보기) (준보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