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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정권의 개입 ===
=== 일본 정권의 개입 ===


일본 정권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 많은 견해는 일본 정권의 개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일본 정권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 많은 견해는 일본 정권의 개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 증거로서, 1) 명성황후 시해 직후, 주한일본공사관의 니이로(新納) 해군소좌가 본국 육군참모부에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힌 극비문서를 보냈다는 점, 2) 일본 정부의 '대원군와 황후 간의 권력 다툼'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일본인들이 살해를 결행하였다는 생존자들의 증언, 3) 일본인들이 황후를 살해하였다는 수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살해범들이 무죄 판결을 받고, 일본 정계에서 승승장구한 사실 등이 꼽힌다.<ref>[http://m.greatcorea.kr/a.html?uid=358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범인은 일본정부 (3부)], 고구려 역사저널, 2013.10.21.</ref>
그 증거로서, 1) 명성황후 시해 직후, 주한일본공사관의 니이로(新納) 해군소좌가 본국 육군참모부에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힌 극비문서를 보냈다는 점, 2) 일본 정부의 '대원군와 황후 간의 권력 다툼'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일본인들이 살해를 결행하였다는 생존자들의 증언, 3) 일본인들이 황후를 살해하였다는 수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살해범들이 무죄 판결을 받고, 일본 정계에서 승승장구한 사실 등이 꼽힌다.<ref>[http://m.greatcorea.kr/a.html?uid=358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한 범인은 일본정부 (3부)], 고구려 역사저널, 2013.10.2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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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원군의 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인 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하는 일본경관을 동원한다.}}
4. 대원군의 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인 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하는 일본경관을 동원한다.}}


미우라는 계획 실행의 행동대원을 구하기 위해 한성신보사의 사장 '''아다치(安達)'''와 낭인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고용하였다.
미우라는 계획 실행의 행동대원을 구하기 위해 한성신보사의 사장 '''아다치(安達)'''와 낭인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고용하였다.  


암살단 1조 대장은 아다치(安達謙藏)사장, 2조 대장은 주필 쿠니토모(國友重章)였다.
암살단 1조 대장은 아다치(安達謙藏)사장, 2조 대장은 주필 쿠니토모(國友重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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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황후는 일본군과 훈련대가 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알고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이는 일본군은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 진입했다는 정병하<ref>정병하는 고종의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군중의 손에 죽었다.</ref>의 조언을 따른 것이기도 하고, 이미 궁궐이 포위되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불행히도 황후는 자신이 표적임을 알지는 못 했다.<ref>[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295891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서울신문, 2012.9.3.</ref>
그러다 황후는 일본군과 훈련대가 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알고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이는 일본군은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 진입했다는 정병하<ref>정병하는 고종의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 어윤중과 함께 군중의 손에 죽었다.</ref>의 조언을 따른 것이기도 하고, 이미 궁궐이 포위되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불행히도 황후는 자신이 표적임을 알지는 못 했다.<ref>[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295891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서울신문, 2012.9.3.</ref>


[[1895년]] [[10월 8일]] 새벽 [[도쿄대]] 등 우익 엘리트 출신으로 구성된 암살단이 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공사관 수비대, [[우범선]]이 이끌던 훈련대와 함께 경복궁에 침입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도쿄대]] 등 우익 엘리트 출신으로 구성된 암살단이 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공사관 수비대, [[우범선]]이 이끌던 훈련대와 함께 경복궁에 침입했다.  


[[광화문]]에 다다른 이들은 미국인 지휘관인 윌리엄 다이가 이끄는 시위대를 맞았는데 시위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곧이어 훈련대의 원래 대장이었던 [[홍계훈]]이 달려와 이들을 꾸짖었으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s>근데 영화에선 용감히 싸우다 전사...</s> 이후 군부대신 안경수도 살해당했다.
[[광화문]]에 다다른 이들은 미국인 지휘관인 윌리엄 다이가 이끄는 시위대를 맞았는데 시위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곧이어 훈련대의 원래 대장이었던 [[홍계훈]]이 달려와 이들을 꾸짖었으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s>근데 영화에선 용감히 싸우다 전사...</s> 이후 군부대신 안경수도 살해당했다.


시위대를 몰아낸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이 <s>감금된</s>거처하던 건녕전 앞 뜰에 모여 대기했고, 흉도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명성황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했다.<ref>독립문 등을 설계한 사바친(A I S Sabatin)은 “마루는 20~25명의 양복 차림 일본인들이 일본도로 무장한 채 점거하고 있었고, 그들은 방의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져 떨어뜨리고 발로 걷어찼다.”라고 증언하였다. [http://mnews.joins.com/article/3924507#home 을미사변 목격했던 조선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 사바친], 중앙일보, 2009.12.16.</ref> 이때 왕세자비마저 흉도들에게 황후의 행방을 밝히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협박당한다.<ref>[http://www.newdaily.co.kr/mobile/mnewdaily/newsview.php?id=213811 산케이, 명성황후 살해범들 '후계자'인가? 사죄 사설부터 써라], 뉴데일리, 2014.8.11.</ref>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흉도들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시위대를 몰아낸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이 <s>감금된</s>거처하던 건녕전 앞 뜰에 모여 대기했고, 흉도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명성황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했다.<ref>독립문 등을 설계한 사바친(A I S Sabatin)은 “마루는 20~25명의 양복 차림 일본인들이 일본도로 무장한 채 점거하고 있었고, 그들은 방의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져 떨어뜨리고 발로 걷어찼다.”라고 증언하였다. [http://mnews.joins.com/article/3924507#home 을미사변 목격했던 조선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 사바친], 중앙일보, 2009.12.16.</ref> 이때 왕세자비마저 흉도들에게 황후의 행방을 밝히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협박당한다.<ref>[http://www.newdaily.co.kr/mobile/mnewdaily/newsview.php?id=213811 산케이, 명성황후 살해범들 '후계자'인가? 사죄 사설부터 써라], 뉴데일리, 2014.8.11.</ref>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흉도들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사실상 마지막으로 황후를 보필한 것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었는데 스스로 두 팔을 벌려 흉도들의 난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총을 맞은 후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에게 양 팔을 잘리고, 결국 허리까지 베이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사실상 마지막으로 황후를 보필한 것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었는데 스스로 두 팔을 벌려 흉도들의 난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총을 맞은 후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에게 양 팔을 잘리고, 결국 허리까지 베이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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