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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까지도 혁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민중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민중과 혁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시키려는 자가 있다.}} | {{인용문2|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까지도 혁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민중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민중과 혁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시키려는 자가 있다.}} | ||
이후 그는 김원봉과 함께 광저우를 탈출해 상하이로 가다가 해적을 만나 총상을 입기도 했지만 어렵사리 우한에 도착했다. 그는 1927년 6월 우한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 | 이후 그는 김원봉과 함께 광저우를 탈출해 상하이로 가다가 해적을 만나 총상을 입기도 했지만 어렵사리 우한에 도착했다. 그는 1927년 6월 우한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김규식]], 이검운(李劍運)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 한커우로 이동한 유자명은 김병태, 최원, 최승년 등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인도 회원 나란신(那蘭辛)의 밀고로 2월 28일 우한공안국에 구속되었다. 우한위수사령부 간수소에 구속된 그와 동지들은 조소연(趙素昻)과 박건웅(朴健雄)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공문을 발송하고 우한공악국과 교섭을 벌인 덕분에 6개월 만인 8월 28일에 석방되었다. | ||
유자명은 석방 직후 난징으로 이동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사무실에 거주하면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쑨원의 저서 <쑨원학설>을 한글로 번역한 그는 국민당 선전부장 예추창(叶楚傖)을 소개받았고, 이때부터 난징에서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29년 봄, 그는 중앙통신사를 경영하는 위안샤오셴(袁紹先)으로부터 한푸옌(韓㚆炎) 열사 기념 합작농장에서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농업기술자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그는 생계가 어려웠기에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농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점차 교육계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 유자명은 석방 직후 난징으로 이동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사무실에 거주하면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쑨원의 저서 <쑨원학설>을 한글로 번역한 그는 국민당 선전부장 예추창(叶楚傖)을 소개받았고, 이때부터 난징에서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29년 봄, 그는 중앙통신사를 경영하는 위안샤오셴(袁紹先)으로부터 한푸옌(韓㚆炎) 열사 기념 합작농장에서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농업기술자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그는 생계가 어려웠기에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농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점차 교육계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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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 [[분류: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 ||
[[분류:충주시 출신]] | [[분류:충주시 출신]] | ||
[[분류:1894년 출생]] | |||
[[분류:1985년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