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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정빈이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 큰 손실을 입은 뒤 9월 4일 우병렬에게 대장 직을 넘겨줬고, 우병렬은 사위 [[이진룡]]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는 1908년 8월까지 1년간 일본군과 싸웠지만 전세가 어려워지자 해외에서 재기를 도모하고자 1911년 10월 의병의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 이후 박정빈이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 큰 손실을 입은 뒤 9월 4일 우병렬에게 대장 직을 넘겨줬고, 우병렬은 사위 [[이진룡]]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는 1908년 8월까지 1년간 일본군과 싸웠지만 전세가 어려워지자 해외에서 재기를 도모하고자 1911년 10월 의병의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 ||
이후 [[최재형]], [[이범윤]]의 의병대에 합류한 그는 1910년 6월 21일 [[유인석]]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참가해 도총소참모(都總所參謀)를 맡았다. 그러다가 류인석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1912년 4월 결별하고 러시아에서 나와 중국 봉천성 관전현 청산구 소아하구로 가서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그리고 의병밀영을 초막으로 짓고, 그 부근에 훈련장도 만들었다. 1922년 가족들을 데리고 본계현, 흥경현 등지로 전전하면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29년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해 7월 20일에 사망했다. | 이후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 [[이범윤]]의 의병대에 합류한 그는 1910년 6월 21일 [[유인석]]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참가해 도총소참모(都總所參謀)를 맡았다. 그러다가 류인석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1912년 4월 결별하고 러시아에서 나와 중국 봉천성 관전현 청산구 소아하구로 가서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그리고 의병밀영을 초막으로 짓고, 그 부근에 훈련장도 만들었다. 1922년 가족들을 데리고 본계현, 흥경현 등지로 전전하면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29년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해 7월 20일에 사망했다. | ||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우병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우병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