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반도 전투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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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인용문2|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ISSN 1739-2705}}
{{인용문2|본 문서는 『[[6.25전쟁사]] 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ISSN 1739-2705}}
{{전쟁 정보
{{전쟁 정보
|전쟁이름 = 옹진반도 전투
|분쟁 = 옹진반도 전투
|원어이름 =  
|전체 = [[서부지역 작전]]
|그림     = [[파일:Battle of Ongjin.jpg]]
|그림 = Battle of Ongjin.jpg
|그림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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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50년 6월 25일 ~ 26일
|날짜 = 1950년 6월 25일 ~ 26일
|위치    = 옹진
|장소 = 옹진
|결과     = 북한의 승리
|상태 =
|단체1    = 북한
|결과 = 북한의 승리
|지휘관1 = 최현 소장<br />김후진 대좌
|이유 =
|병력1    = 11,000 명
|교전국1 = 북한
|피해1    = '''사망''' 581 명
|교전국2 = 대한민국
|단체2    = 대한민국
|지휘관1 = 최현 소장<br>김후진 대좌
|지휘관2  = 백인엽 대령
|지휘관2 = 백인엽 대령
|병력2   = 3,600
|군대1 =  
|피해2    = '''사망''' 113 <br />'''부상''' 371 명<br />'''실종''' 64 명
제1군단
|단체3    =
* 제3경비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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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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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


== 개요 ==
북한군은 옹진지구를 조기에 장악할 생각으로 제6사단 제1연대로 제3경비여단을 증원토록 하여 국군 제17연대를 공격했다. 제17연대는 병력의 열세와 불리한 지형에서도 분투하였지만 동서로 양분되었고, 본래 육군본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해상철수를 실시하였다.
북한군은 옹진지구를 조기에 장악할 생각으로 제6사단 제1연대로 제3경비여단을 증원토록 하여 국군 제17연대를 공격했다. 제17연대는 병력의 열세와 불리한 지형에서도 분투하였지만 동서로 양분되었고, 본래 육군본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해상철수를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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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전방 제3대대 상황 ===
=== 우전방 제3대대 상황 ===
04:00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평소와 같은 일상적인 포격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각 중대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각 중대에 경계 강화를 명령하는 한편 연대장에게 보고하고 지원포격을 요청하였다.<ref>당시 105mm 포병 운영은 미 고문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ref> 05:00 미 고문관 브라운 소령은 전황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연대장의 사격요청을 승인하였다. 이에 제7포병대대가 105mm 포의 사격을 시작하였다.
04:00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평소와 같은 일상적인 포격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각 중대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각 중대에 경계 강화를 명령하는 한편 연대장에게 보고하고 지원포격을 요청하였다.<ref>당시 105mm 포병 운영은 미 고문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ref> 05:00 미 고문관 브라운 소령은 전황의 흐름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연대장의 사격요청을 승인하였다. 이에 제7포병대대가 105mm 포의 사격을 시작하였다.  


05:30 북한의 포격에 대대관측소가 파괴되고 유무선 통신 기재가 파손되어 지휘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제9중대장의 무전기를 통해 각 중대와의 통신망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연대와의 연락이 끊어져 지원요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05:30 북한의 포격에 대대관측소가 파괴되고 유무선 통신 기재가 파손되어 지휘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제9중대장의 무전기를 통해 각 중대와의 통신망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연대와의 연락이 끊어져 지원요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군 제1연대가 장갑차량을 앞세워 도로를 따라 침공하였으며 봉오리 지역으로 제3대대를 고립시켰다. 08:00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9중대와 함께 석계리로 철수한 대대장은 각 중대의 위치를 확인하였는데 공격을 받아 분산되었음을 알게되었다. 때마침 대대장이 강령가도를 남하하는 짚차를 발견해 확인해보니 연대장이 보낸 장교가 타고 있었다. 전선을 유지하고 통신망을 확보라하는 연대장의 명령을 전달받은 대대장은 북한군의 공세를 버티기 어려우니 지원병력을 보내달라고 말한 뒤 연락장교를 돌려보냈다.
북한군 제1연대가 장갑차량을 앞세워 도로를 따라 침공하였으며 봉오리 지역으로 제3대대를 고립시켰다. 08:00 전세가 불리해지자 제9중대와 함께 석계리로 철수한 대대장은 각 중대의 위치를 확인하였는데 공격을 받아 분산되었음을 알게되었다. 때마침 대대장이 강령가도를 남하하는 짚차를 발견해 확인해보니 연대장이 보낸 장교가 타고 있었다. 전선을 유지하고 통신망을 확보라하는 연대장의 명령을 전달받은 대대장은 북한군의 공세를 버티기 어려우니 지원병력을 보내달라고 말한 뒤 연락장교를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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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아무런 저항 없이 대대본부에 진입해 방심했던 북한군은 제2대대의 포격과 기습을 받자 큰 혼란에 빠지고 큰 피해를 입었다. 대대장은 승기를 잡기 위해 제5중대에게 역습을 지시하고, 제7중대를 전방 사동으로 진출시켰다.
07:00 아무런 저항 없이 대대본부에 진입해 방심했던 북한군은 제2대대의 포격과 기습을 받자 큰 혼란에 빠지고 큰 피해를 입었다. 대대장은 승기를 잡기 위해 제5중대에게 역습을 지시하고, 제7중대를 전방 사동으로 진출시켰다.


09:00 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마현으로 와 대대를 격려하고 제3대대의 전황이 좋지 않으니 그쪽으로 1개 중대를 파견하라고 명령하였다. 대대 대부분이 승기를 잡고 적과 교전 중이었기에 제8중대의 박격포소대와 제3포대를 강령으로 파견하였다.
09:00 연대장 백인엽 대령이 마현으로 와 대대를 격려하고 제3대대의 전황이 좋지 않으니 그쪽으로 1개 중대를 파견하라고 명령하였다. 대대 대부분이 승기를 잡고 적과 교전 중이었기에 제8중대의 박격포소대와 제3포대를 강령으로 파견하였다.  


10:00 대대장이 대대 관측소를 제1대대 본부 동측능선으로 추진하고 반격하고 있는 제5중대를 격려하고 있을 때 소총탄이 좌측 안면부를 스쳐 귀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대대장은 위생병에게 응급치료를 받고 계속 작전을 지휘하였다.
10:00 대대장이 대대 관측소를 제1대대 본부 동측능선으로 추진하고 반격하고 있는 제5중대를 격려하고 있을 때 소총탄이 좌측 안면부를 스쳐 귀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대대장은 위생병에게 응급치료를 받고 계속 작전을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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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0 부포항에 해군 LST-801함이 도착, 함장 김옥경 대위가 연대장을 찾아와 내일 08:00에는 썰물이라 배가 떠날 수 없으니 그 전에 승선 완료를 부탁하였고, 이에 연대장은 다음 일몰시까지 승선을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23:30 부포항에 해군 LST-801함이 도착, 함장 김옥경 대위가 연대장을 찾아와 내일 08:00에는 썰물이라 배가 떠날 수 없으니 그 전에 승선 완료를 부탁하였고, 이에 연대장은 다음 일몰시까지 승선을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26일 00:30 전선으로 돌아간 연대장은 제3대대와 포병대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1개 중대씩 철수를 명령하였고, 어떠한 소리나 불빛도 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철수는 01:00부터 시작하여 05:00에는 제3대대 1개 중대와 포병대대 1개 포대, 대전차포중대만 남게 되었다.
26일 00:30 전선으로 돌아간 연대장은 제3대대와 포병대대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1개 중대씩 철수를 명령하였고, 어떠한 소리나 불빛도 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철수는 01:00부터 시작하여 05:00에는 제3대대 1개 중대와 포병대대 1개 포대, 대전차포중대만 남게 되었다.  


05:00 적이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을 재개하자 이에 남은 제3대대 제11중대를 철수시키고 남은 대전차포와 곡사포의 사격을 지속시켰다. 북한군의 자주포는 국군의 포화를 뚫고 06:00 중기동 앞 하천까지 진출하였지만 교량은 이미 국군에 의해 파괴된지라 교량복구를 위해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북한군이 교량을 복구하는 사이 연대장은 남아있던 병력과 장비를 부포항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대전차포 2개문을 부포 진입로의 은폐된 곳에 배치하였다.
05:00 적이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을 재개하자 이에 남은 제3대대 제11중대를 철수시키고 남은 대전차포와 곡사포의 사격을 지속시켰다. 북한군의 자주포는 국군의 포화를 뚫고 06:00 중기동 앞 하천까지 진출하였지만 교량은 이미 국군에 의해 파괴된지라 교량복구를 위해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북한군이 교량을 복구하는 사이 연대장은 남아있던 병력과 장비를 부포항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대전차포 2개문을 부포 진입로의 은폐된 곳에 배치하였다.  


08:00 썰물이 진행되자 LST-801함은 부포항에서 5km 떨어진 해안에 정박하고 탑제된 소형함과 어선을 이용해 병력을 실어날랐다.
08:00 썰물이 진행되자 LST-801함은 부포항에서 5km 떨어진 해안에 정박하고 탑제된 소형함과 어선을 이용해 병력을 실어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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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연대장과 박소령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물결치는 대로 흘러갔다. 이들은 표류 중 어선에 의해 구조되어 19:00 연평도에 도착, 연평면 향토방위대원들과 함께 연평도 방위책을 강구하였다.
14:00 연대장과 박소령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물결치는 대로 흘러갔다. 이들은 표류 중 어선에 의해 구조되어 19:00 연평도에 도착, 연평면 향토방위대원들과 함께 연평도 방위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백인엽 대령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JMS-302함과 JMS-307함이 연평도에 접안하였고, 백인엽 대령과 부하 41명은 해군 소해정의 구출을 받아 27일 02:00에 연평도를 떠났다.
이때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백인엽 대령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JMS-302함과 JMS-307함이 연평도에 접안하였고, 백인엽 대령과 부하 41명은 해군 소해정의 구출을 받아 27일 02:00에 연평도를 떠났다.  


한편 26일 14:00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탑승한 LST는 사곶 연안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이 이미 북한군에 점령되었고 제1, 제2대대의 거취를 알지 못해 인천으로 돌아갔다.
한편 26일 14:00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탑승한 LST는 사곶 연안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이 이미 북한군에 점령되었고 제1, 제2대대의 거취를 알지 못해 인천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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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소령은 사곶으로 철수하기로 정하고 7대의 2.5톤 차량에 기관총을 거치해 선두에 5대는 전투병력 2대는 부상자를 싣고 탄약차를 뒤따르게 하였다.
송 소령은 사곶으로 철수하기로 정하고 7대의 2.5톤 차량에 기관총을 거치해 선두에 5대는 전투병력 2대는 부상자를 싣고 탄약차를 뒤따르게 하였다.


19:30 연근산에 도착해 그곳에서 개별적으로 철수하던 병력과 합세하였으며 700여 명 정도로 늘었다.
19:30 연근산에 도착해 그곳에서 개별적으로 철수하던 병력과 합세하였으며 700여 명 정도로 늘었다.  


21:00 대대장은 제7, 제4중대의 박격포소대를 연근산에 잔류시켜 사곶으로 철수하는 본대를 엄호하게 했다. 사곶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그곳에 모인 군인, 경찰, 피난민들이 배를 찾느라 혼란에 빠져있었다. 송호림 소령은 하늘에 권총을 쏘아 모두를 진정시키고 인원을 세어보니 1,300여 명의 군인을 포함한 2,000여 명이었다.
21:00 대대장은 제7, 제4중대의 박격포소대를 연근산에 잔류시켜 사곶으로 철수하는 본대를 엄호하게 했다. 사곶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그곳에 모인 군인, 경찰, 피난민들이 배를 찾느라 혼란에 빠져있었다. 송호림 소령은 하늘에 권총을 쏘아 모두를 진정시키고 인원을 세어보니 1,300여 명의 군인을 포함한 2,000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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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 서장대행을 하고 있던 김선진 경감이 찾아와 말하길 용호도에 지서용 경비정이 있는데 우리가 보내달라 해도 오지 않으니 대대장께서 요청해 보라 말했다. 이에 대대장이 용호지서주임을 전화로 호출해 빨리 배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다행히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23:00 서장대행을 하고 있던 김선진 경감이 찾아와 말하길 용호도에 지서용 경비정이 있는데 우리가 보내달라 해도 오지 않으니 대대장께서 요청해 보라 말했다. 이에 대대장이 용호지서주임을 전화로 호출해 빨리 배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다행히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대대장은 부두에 세워진 차량을 불태우게 하고 배의 접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를 보던 군중들이 제각기 먼저 타려고 하자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대장이 다시 권총을 쏘아 진정시키고 "질서를 어기고 먼저 타려는 자, 또는 정원을 무시하고 타려는 자는 총살에 처한다. 승선순위는 군인, 경찰, 민간인 순으로 하되, 여기 있는 사람은 전원 수송할 것이니 질서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려라"고 말했다.
대대장은 부두에 세워진 차량을 불태우게 하고 배의 접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를 보던 군중들이 제각기 먼저 타려고 하자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대장이 다시 권총을 쏘아 진정시키고 "질서를 어기고 먼저 타려는 자, 또는 정원을 무시하고 타려는 자는 총살에 처한다. 승선순위는 군인, 경찰, 민간인 순으로 하되, 여기 있는 사람은 전원 수송할 것이니 질서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려라"고 말했다.


질서가 잡히자 경비정이 육지에 닿았다. 경비정은 정원 90명의 선박이었으나 대대장은 안전을 위해 80명씩 승선시켰다. 그리고 하선시 수면에서 뛰어내리게 하여 시간을 단축시키도록 하였다. 대대장은 전날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매회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였다.
질서가 잡히자 경비정이 육지에 닿았다. 경비정은 정원 90명의 선박이었으나 대대장은 안전을 위해 80명씩 승선시켰다. 그리고 하선시 수면에서 뛰어내리게 하여 시간을 단축시키도록 하였다. 대대장은 전날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매회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였다.  


26일 07:00 군인과 경찰의 해상철수가 끝나고 후위를 담당했던 제1중대가 승선할 무렵 북한군의 포탄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포화가 점점 더욱 거세지자 민간인 500여 명의 철수를 포기하게 되었다.
26일 07:00 군인과 경찰의 해상철수가 끝나고 후위를 담당했던 제1중대가 승선할 무렵 북한군의 포탄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포화가 점점 더욱 거세지자 민간인 500여 명의 철수를 포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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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국방부는 17연대가 해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방송했는데 이는 순전히 오보이다. 당시 연합신문사 최기덕 기자 말로는 자신이 이곳의 북한침공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백인엽 대령과 만났고, 그때 백인엽 대령이 자신(최기자)에게 "백인엽이는 부대를 지휘하여 해주로 진격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국방부에 전했다는 것
6월 25일 국방부는 17연대가 해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방송했는데 이는 순전히 오보이다. 당시 연합신문사 최기덕 기자 말로는 자신이 이곳의 북한침공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백인엽 대령과 만났고, 그때 백인엽 대령이 자신(최기자)에게 "백인엽이는 부대를 지휘하여 해주로 진격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국방부에 전했다는 것


문제는 당사자인 백인엽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당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제대로 기자와 만나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며, 당시 상황에서 해주 진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문제는 당사자인 백인엽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당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제대로 기자와 만나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으며, 당시 상황에서 해주 진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결국 해주진공설은 <s>기레기</s>기자의 잘못된 정보전달에 빚어진 결과였다.
결국 해주진공설은 <s>기레기</s>기자의 잘못된 정보전달에 빚어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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