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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된 후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갈등이 극심해지자 이를 조정하려 애썼지만 실패했고, 이후 중국 국민당 요인 장소의(張紹儀)를 만나 조국 광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한중합작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상하이와 난징 등지에 사는 청년들을 중국 각 학교와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일제 밀정들을 숙청하면서 중국 학생회·혁명당과 긴밀한 연결을 취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된 후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갈등이 극심해지자 이를 조정하려 애썼지만 실패했고, 이후 중국 국민당 요인 장소의(張紹儀)를 만나 조국 광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한중합작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상하이와 난징 등지에 사는 청년들을 중국 각 학교와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일제 밀정들을 숙청하면서 중국 학생회·혁명당과 긴밀한 연결을 취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 ||
1925년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1926년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가해 [[장제스]] 총사령관의 본부에 근무했으며, 1927년 [[ | 1925년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1926년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가해 [[장제스]] 총사령관의 본부에 근무했으며, 1927년 [[김규식]], [[유자명]]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대표 겸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봉천군벌이 한국의 지사들을 일제의 밀정으로 단정하여 추방하려 하자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와 교섭하여 이를 중단하게 했고, 1929년 [[안창호]] 등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한국독립당 난징지부를 설치하고 [[박찬익]] 등과 함께 주요 간부로 활약했다. | ||
1930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정치과를 졸업한 신공제는 1931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1933년 1월 상해에서 이유필·김동우·[[안경근]]·박창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대회(韓國獨立黨大會)를 개최하여 이사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동년 6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각 단체의 대일전쟁의 합작과 각 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또한 1934년 김규식 등과 중국인을 설득, 한중연합군을 창설하고 공동항일전선을 폈다. | 1930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정치과를 졸업한 신공제는 1931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1933년 1월 상해에서 이유필·김동우·[[안경근]]·박창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대회(韓國獨立黨大會)를 개최하여 이사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동년 6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각 단체의 대일전쟁의 합작과 각 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또한 1934년 김규식 등과 중국인을 설득, 한중연합군을 창설하고 공동항일전선을 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