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 당신의 편집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파일:시티폰 기지국.jpg|thumb | {{youtube|nlLpgCMzEW0|||center}} | ||
'''시티폰'''(City Phone)은 [[1997년]] 초에 런칭한 | [[파일:시티폰 기지국.jpg|thumb]] | ||
== 개요 == | |||
'''시티폰'''(City Phone)은 [[1997년]] 초에 런칭한 [[휴대전화]] 서비스의 일종이다. | |||
당시 외부에서 통화하는 방법은 공중전화와 [[휴대전화]] 서비스(셀룰러)가 있었지만 공중전화는 오래 기다려야 했고 셀룰러는 비쌌다. 시티폰은 그 틈을 파고들어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기술적으로 [[무선전화|CT-2]]에 기반하며, 발신만 할 수 있었다. 기지국은 일반 전화망에 바로 접속했기에 [[공중전화]]를 중심으로 지하철역, 다중이용시설에 구축되었으며 기지국의 100m 부근에서 통화가 가능했다. 기술적으로 가정용 무선전화와 다르지 않았으므로 가정용 기지국을 들여놓으면 집 전화처럼 쓸 수 있었다.<ref>[http://news.hankyung.com/article/1997050802611 시티폰, 집에선 무선전화기 .. HBS 등장], 한국경제, 1997.05.08.</ref> 필요하다면 음성 모뎀을 연결해 데이터 통신도 할 수 있었다. | |||
기술적으로 [[무선전화|CT-2]]에 기반하며, 발신만 할 수 있었다. 기지국은 | |||
[[삐삐]] 호출이 들어오면 시티폰으로 발신하면 되었기에 [[삐삐]]와 단짝으로 취급되었으며 삐삐 통합 단말기도 출시되었다. 삐삐 번호로 전화하면 시티폰으로 받을 수 있는 착신 서비스도 선보였다. - 정확히 말하면 쌍방 발신으로 삐삐 번호로 상대방이 발신하면 시티폰의 무선호출부가 울리고, 시티폰에서 발신하면 통화가 성립하는 구조다. | |||
[[한국통신]](현 KT)과 10개 지역 무선호출 사업자들이 연합해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각자 기지국을 구축하고 상호 접속할 수 있도록 했다. 초기에는 지역 사업자의 시티폰이 지역 바깥에서 터지지 않아 논란이 되었으나,<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50600289108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7-05-06&officeId=00028&pageNo=8&printNo=2871&publishType=00010 시티폰'서비스 마찰'가입자 골탕], 한겨레, 1997.05.06.</ref> 사업자간 로밍을 시작하면서 불편이 종식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70300099112002&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7-07-03&officeId=00009&pageNo=12&printNo=9796&publishType=00010 시티폰 로밍서비스], 한국경제, 1997.07.03.</ref> | |||
== 빠른 쇠락 == | |||
기네스에 오를 정도로<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0200289108014&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08-02&officeId=00028&pageNo=8&printNo=2947&publishType=00010 서울이통'가입자확보'기네스 기록], 한겨레, 1997.08.02.</ref> 시티폰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CT-2는 많은 사용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표준으로 폭발적인 사용자 증가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시티폰 가입자들은 항상 불통인 전화에 불만이 팽배했고, 대리점은 안 터지는 전화를 팔 수 없다며 반발하기도 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1773736_19498.html 통화 안되고 기본료만 내야하는 시티폰 말썽], MBC, 1998.11.10.</ref> | 기네스에 오를 정도로<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0200289108014&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7-08-02&officeId=00028&pageNo=8&printNo=2947&publishType=00010 서울이통'가입자확보'기네스 기록], 한겨레, 1997.08.02.</ref> 시티폰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CT-2는 많은 사용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표준으로 폭발적인 사용자 증가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시티폰 가입자들은 항상 불통인 전화에 불만이 팽배했고, 대리점은 안 터지는 전화를 팔 수 없다며 반발하기도 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1773736_19498.html 통화 안되고 기본료만 내야하는 시티폰 말썽], MBC, 1998.11.10.</ref> | ||
기지국은 소형·소출력으로 범위가 제한되고, 기지국 1곳 당 동시에 10개 회선을 채 연결하지 못해 시범서비스때도 통화 성공율이 50%를 밑돌았다. 또한 제한적인 [[핸드오프]] 때문에 이동하면서 전화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주머니 속의 공중전화’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 주력했지만, 되려 그 이미지가 발목을 잡게 되었다. 시티폰이 생긴지 반년 남짓 지나 [[CDMA|PCS]] 서비스가 1997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PCS는 셀룰러처럼 어디서나 전화 수발신이 모두 가능했으며 제한적이나마 문자도 가능했고, 시티폰보다 비쌌지만 셀룰러보다 저렴했다. 시티폰이 절정인 시점에 사람들은 시티폰을 버리고 PCS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 |||
== | 시티폰 서비스가 쇠락하고 IMF가 겹치면서 중소업체에 불과한 무선호출 사업자들이 적자를 계속 버틸 순 없었고,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잔여 가입자는 한국통신이 모두 떠안았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31900209121017&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3-19&officeId=00020&pageNo=21&printNo=23825&publishType=00010 시티폰사업 내달부터 한국통신으로 일원화], 동아일보, 1998.03.19.</ref> IMF 시대에 가장 저렴한 이동전화로 근근히 버텼지만 KT도 2000년에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해지시키거나 KTF PCS재판매 회선을 할당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12500099114007&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9-11-25&officeId=00009&pageNo=14&printNo=10532&publishType=00010 시티폰 내년 1월말 서비스 중단], 매일경제, 1999.11.25.</ref> | ||
서비스 개시가 10년 빨랐던 해외와 달리 한국에선 PCS 사업자와 시티폰 사업자가 동시기에 지정되어 서비스 개시 또한 겹칠 수 밖에 없었기에<ref>[http://www.comworld.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011 PCS와 시티폰, 그리고 제4이통], 컴퓨터월드, 2016.06.30.</ref> 정부의 실책으로 평가된다.<ref>[http://news.joins.com/article/3618450 감사원, 시티폰 관련 공무원들 징계 검토…예산 1천억원 낭비], 중앙일보, 1998.03.16.</ref> 시티폰 실책으로 한국통신은 혈세를 쏟아붓고도 적자를 보게 됐고, 민간 사업자와 단말기 생산자, 대리점주가 연쇄적으로 피해를 봤다. | |||
== 기타 == | == 기타 == | ||
* [[씨티은행]]의 [[텔레뱅킹]] 상표인 ‘씨티폰(Citiphone)’과 유사해 [[상표]] 분쟁이 있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7220028910801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7-07-22&officeId=00028&pageNo=8&printNo=2937&publishType=00010 '시티폰'상표 그대로 쓴다], 한겨레, 1997.07.22.</ref> | * [[씨티은행]]의 [[텔레뱅킹]] 상표인 ‘씨티폰(Citiphone)’과 유사해 [[상표]] 분쟁이 있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7220028910801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7-07-22&officeId=00028&pageNo=8&printNo=2937&publishType=00010 '시티폰'상표 그대로 쓴다], 한겨레, 1997.07.22.</ref> | ||
* [[응답하라 1994]]에도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데, 극중 [[성동일]]이 대박날 줄 알고 시티폰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가 위에 나온 쇠락을 겪고 나서 넋이 나갔다는 이야기다. [[성동일]]의 실성한 연기가 일품인데다 웃프기도 한 [https://www.youtube.com/watch?v=H_BUwuxshqM 명장면]이다. 참고로 그 장면 자체는 시기가 어긋난 고증 오류이다.<ref>[http://stock.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3122427631 '응답하라 1994' 시티폰 쪽박의 진실], 한국경제, 2013.12.24.</ref> | * [[응답하라 1994]]에도 관련 이야기가 나오는데, 극중 [[성동일]]이 대박날 줄 알고 시티폰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가 위에 나온 쇠락을 겪고 나서 넋이 나갔다는 이야기다. [[성동일]]의 실성한 연기가 일품인데다 웃프기도 한 [https://www.youtube.com/watch?v=H_BUwuxshqM 명장면]이다. 참고로 그 장면 자체는 시기가 어긋난 고증 오류이다.<ref>[http://stock.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3122427631 '응답하라 1994' 시티폰 쪽박의 진실], 한국경제, 2013.12.24.</ref> | ||
{{각주}} | {{각주}} | ||
[[분류:이동통신]] | [[분류:이동통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