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 당신의 편집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분류:사적]][[분류:한국의 성]] | |||
[[분류:읍성]] | |||
{{문화재 | |||
|그림 = 낙안읍성.JPG | |||
|종목 = [[사적]] 제302호 | |||
|명칭 = 낙안읍성 | |||
|한자 = 樂安邑城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 |||
| | |수량= | ||
| | |면적 = 223,108㎡ | ||
| | |날짜 = [[1983년]] [[6월 14일]] | ||
| |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내리 299-1번지 | ||
| | |시대 = [[조선]]시대 | ||
|소유 = | |||
|관리 = [[순천시]] | |||
| | |||
| | |||
| | |||
| | |||
}} | }} | ||
==개요== | |||
* 위치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 *위치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 ||
* 축성시기 : [[1397년]] | *축성시기 : [[1397년]] | ||
* 문화재 지정 : [[사적]] 제302호 | *문화재 지정 : [[사적]] 제302호 |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시대에 축성된 [[읍성]].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본래는 흙으로 만든 [[토성 (건축물)|토성]]이었지만, [[1424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 |||
이 성에는 옛 낙안군 관아도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만 하여도 낙안군은 순천과는 독립된 별개의 고을이었다. 하지만 [[1908년]], 일제는 벌교 지역에서 일어난 안규홍의 의병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낙안군을 폐군해 버리고''' 군을 쪼개서 각각 순천과 보성에 편입시켰다.(심지어 [[부군면 통폐합]] 이전의 일이다) | |||
[[파일:Boseong historical 1.png|섬네일|왼쪽|폐군 직전 낙안군의 영역.]] | |||
{{-}} | |||
== | ==제원== | ||
성둘레 약1.4km의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읍성]]이며, 중간에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축성이 되어서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 성문은 3개소로 정문인 남문에는 옹성과 치(적대), 그리고 약간의 여장이 존재하고 있다. | |||
== | ==특성== | ||
[[ |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는 세 곳의 [[읍성]] 중 하나{{ㅈ|다른 곳은 [[해미읍성]]과 [[고창읍성]]이 있다}}이다. 여기에 낙안읍성 내부의 마을은 낙안민속마을이라고 하여서 전통마을의 형태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으면서 초가지붕은 매년 가을에 초가를 갈아주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 ||
우리나라에너는 돌로 쌓은 성곽의 경우 토축을 먼저 한 뒤 한쪽만 돌을 두르는 내탁법을 주로 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 낙안읍성은 성벽 내부도 돌을 두른 협축법을 사용하여 쌓은 성곽이다. | |||
==찾아가는 법== | |||
*자동차 : [[네비게이션]]에서 낙안읍성이나 낙안민속마을을 찍으면 쉽게 갈 수 있다. 만일 네비가 없다면 순천에서 [[국가지원지방도 제58호선|58번 국가지원지방도]]나 보성의 벌교읍에서 [[지방도 제857호선]]을 타고 표지판을 잘 따라가도록 하자. {{ㅊ|정말로 내비가 없다면 티맵이나 올레내비라도 켜도록 하자}} | |||
*대중교통 : [[순천역]]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1시간 남짓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이외에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낙안으로 가는 보성교통 버스가 있으므로 이를 이용하면 된다. 참고로 순천보다는 벌교가 거리가 훨씬 더 가깝고 버스도 많이 다닌다. | |||
{{주석}}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