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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출토 유물로는 금동제품을 비롯해 각종 철기루와 토기류 등이 나왔으며 특히 5호분에서는 백제계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철제초두, 고리자루칼, 곡옥, 귀걸이 등이 다수 출토되어 무덤 주인의 신분이 꽤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당시 출토 유물로는 금동제품을 비롯해 각종 철기루와 토기류 등이 나왔으며 특히 5호분에서는 백제계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철제초두, 고리자루칼, 곡옥, 귀걸이 등이 다수 출토되어 무덤 주인의 신분이 꽤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주거유적은 청동기 시대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는 마을 형태의 주거지역(취락)도 함께 확인되었으며 | 주거유적은 청동기 시대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는 마을 형태의 주거지역(취락)도 함께 확인되었으며 | ||
이 | 이외에 조선시대 주거지로 확인된 7기의 주거지 형태는 한쪽 벽면에 부뚜막과 구들장(온돌)이 있는 평면의 부정원형으로 확인되어 이후에도 이 일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 ||
이 유적에서 다양하게 나온 분구묘 양식으로 분구묘와 분묘군의 형성과정 등을 보다 상세히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무덤과 집터의 공간 배치에서 둘의 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양상을 확인하여 당시 생활지역과 무덤유적의 분리가 확실히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또한 중앙 역사에서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은 백제 지방 세력의 실체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철제초두와 같이 왕릉이나 이에 준하는 신분에 해당하는 유물이 나온 만큼 당시 백제 중앙과 지방 세력간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 |||
==기타== | ==기타== | ||
*이 유적지 바로 뒤편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애초에 임대아파트 부지로 시굴조사를 하다 나온 유적지인만큼 유적지 이외 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은 당연한 것인데 아파트 입장에서 보면 무덤뷰(...)가 되는 묘한 상황이 된다. | *이 유적지 바로 뒤편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애초에 임대아파트 부지로 시굴조사를 하다 나온 유적지인만큼 유적지 이외 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은 당연한 것인데 아파트 입장에서 보면 무덤뷰(...)가 되는 묘한 상황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