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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謝, 史, 舍)씨는 [[중국의 성씨|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 '''사'''(謝, 史, 舍)씨는 [[중국의 성씨|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 ||
== 역사 사 史 == | == 역사 사 史 == | ||
사(史)씨는 중국 경조(京兆 : [[ | 사(史)씨는 중국 경조(京兆 : [[산시 성 (섬서성)|섬서성]] [[상뤄 시|관중도]] 장안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나라]] 때 '''사질'''(史侄)이라는 벼슬 이름을 따서 사(史)씨가 되었다고 한다. | ||
사(史)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9,756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09위이다. 본관은 [[청주 사씨|청주]], [[거창 사씨|거창]] 등 19본이 있다. | 사(史)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9,756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09위이다. 본관은 [[청주 사씨|청주]], [[거창 사씨|거창]] 등 19본이 있다. | ||
* '''[[거창 사씨]]'''(居昌史氏)는 [[고려 예종]] 때 귀화하여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여진(女眞)의 침입을 토벌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거창(居昌)에 뿌리를 내린 '''사영'''(史榮)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인물로는 고려 [[고려 명종|명종]] 때 명종 때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사정유]](史正儒), [[고려 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사홍기(史洪紀), 병부상서(兵部尙書) 사광필(史光弼), 안무사(安無使) 사정기(史挺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는 370명이다. | |||
* '''[[거창 사씨]]'''(居昌史氏)는 [[고려 예종]] 때 귀화하여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여진(女眞)의 침입을 토벌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거창(居昌)에 뿌리를 내린 '''사영'''(史榮)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인물로는 고려 [[고려 명종|명종]] 때 명종 때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사정유]](史正儒), [[고려 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사홍기(史洪紀), 병부상서(兵部尙書) 사광필(史光弼), 안무사(安無使) 사정기(史挺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는 370명이다. | |||
* '''[[청주 사씨]]'''(靑州史氏)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 출신인 '''사요'''(史繇)가 명(明)나라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올랐으나 세자(世子)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모함을 받자 아들 형제 중 장남 중(重)을 데리고 1372년(공민왕 21) [[고려]](高麗)에 망명하여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月籠面) 위전리(葦田里)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2000년 인구는 7,486명이다. | * '''[[청주 사씨]]'''(靑州史氏)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 출신인 '''사요'''(史繇)가 명(明)나라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올랐으나 세자(世子)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모함을 받자 아들 형제 중 장남 중(重)을 데리고 1372년(공민왕 21) [[고려]](高麗)에 망명하여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月籠面) 위전리(葦田里)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2000년 인구는 7,486명이다. | ||
** [[청송 사씨]](靑松史氏)는 청주 사씨의 시조 사요(史繇)가 고려에 건너올 때 중국에 두고 온 둘째 아들 사직(史直)의 8세손인 사세용(史世用)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원군으로 출정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조선에 귀화하여 경북 청송에 터를 잡아 본관을 청송으로 칭관(稱貫)해 왔다. 2000년 인구는 251명이다. | ** [[청송 사씨]](靑松史氏)는 청주 사씨의 시조 사요(史繇)가 고려에 건너올 때 중국에 두고 온 둘째 아들 사직(史直)의 8세손인 사세용(史世用)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원군으로 출정했다가 난이 평정된 후 조선에 귀화하여 경북 청송에 터를 잡아 본관을 청송으로 칭관(稱貫)해 왔다. 2000년 인구는 251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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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례할 사 謝 == | == 사례할 사 謝 == | ||
사(謝)씨는 시조는 '''사신백'''(謝申伯)으로 [[강태공]]의 후손이다. 인물로는 동진(東晋)시대 문학가 [[사안]](謝安), 중국 6조시대(六朝時代)의 문인 [[사령운]](謝靈運)이 있다. 현대 인물로는 배우 [[사정봉]]이 있다. | 사(謝)씨는 시조는 '''사신백'''(謝申伯)으로 [[강태공]]의 후손이다. 인물로는 동진(東晋)시대 문학가 [[사안]](謝安), 중국 6조시대(六朝時代)의 문인 [[사령운]](謝靈運)이 있다. 현대 인물로는 배우 [[사정봉]]이 있다. | ||
사(謝)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13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233위이다. 본관(本貫)은 진주(晋州)와 한산(韓 山) 2본으로 전한다. 청나라 말기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다. | 사(謝)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13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233위이다. 본관(本貫)은 진주(晋州)와 한산(韓 山) 2본으로 전한다. 청나라 말기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은 밝힐 수 없다. | ||
== 집 사 舍 == | == 집 사 舍 == | ||
'''사'''(舍)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23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214위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사(舍)씨의 본관이 부평(富平)과 태안(泰安) 2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는 부평 사씨 194명, 태안 사씨 19명이다. | '''사'''(舍)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23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214위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사(舍)씨의 본관이 부평(富平)과 태안(泰安) 2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는 부평 사씨 194명, 태안 사씨 19명이다. | ||
사(舍)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2가구가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당시 경기도 파주군에 살고 있던 사재성(舍在成) 씨의 말에 따르면, 본성(本姓)이 김(金)씨였는데 10대조(代祖) 김극윤(金克胤)씨가 사(舍)씨로 개성(改姓)했다고 하나 고증할 수 없다. | 사(舍)는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2가구가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당시 경기도 파주군에 살고 있던 사재성(舍在成) 씨의 말에 따르면, 본성(本姓)이 김(金)씨였는데 10대조(代祖) 김극윤(金克胤)씨가 사(舍)씨로 개성(改姓)했다고 하나 고증할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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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佘, 여)씨는 기록에 일부 남아 있으나, 현재에는 사라졌다. [[고구려]]에 [[사부구]](師夫仇)라는 장수가 있었으나, 사(師)씨는 현재 없다. 사(佘, 師)씨는 한국의 토착 성본이다. | '''사'''(佘, 여)씨는 기록에 일부 남아 있으나, 현재에는 사라졌다. [[고구려]]에 [[사부구]](師夫仇)라는 장수가 있었으나, 사(師)씨는 현재 없다. 사(佘, 師)씨는 한국의 토착 성본이다. | ||
[[백제]], [[마한]]의 토성에는 한자가 조금씩 다른 '''사택'''(砂宅)씨, '''사택'''(沙宅)씨, 그리고 [[사타]](沙吒), 사문(沙門)씨가 있었고, 이들이 단성으로 줄여 사(沙), 사(斯)씨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들은 복성이었으므로 단성 사(沙)씨와는 다르다. 백제에는 남방에서 용병을 데려와 특이한 복성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정벌하고 백제 유민을 데려갔으며, [[당나라]]도 백제를 멸하고 이들을 데려갔다. | [[백제]], [[마한]]의 토성에는 한자가 조금씩 다른 '''사택'''(砂宅)씨, '''사택'''(沙宅)씨, 그리고 [[사타]](沙吒), 사문(沙門)씨가 있었고, 이들이 단성으로 줄여 사(沙), 사(斯)씨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들은 복성이었으므로 단성 사(沙)씨와는 다르다. 백제에는 남방에서 용병을 데려와 특이한 복성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정벌하고 백제 유민을 데려갔으며, [[당나라]]도 백제를 멸하고 이들을 데려갔다. | ||
단성 사(師), 사(沙), 사(斯)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간혈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설에 사씨가 죽을 사(死)를 연상시켜 한국의 사씨들이 다른 성으로 변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단성 사(師), 사(沙), 사(斯)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간혈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설에 사씨가 죽을 사(死)를 연상시켜 한국의 사씨들이 다른 성으로 변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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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성씨}} | {{한국인의 성씨}} | ||
{{퍼온문서|사 (성씨)|15569028}} | {{퍼온문서|사 (성씨)|15569028}} | ||
[[분류:성씨]] | |||
[[분류:한국인의 성씨]] | [[분류:한국인의 성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