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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칸디아에서는 [[1648년#5월|1648년 5월]]부터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튀르크군에게는 이런 소문이 돌 정도로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 한편 칸디아에서는 [[1648년#5월|1648년 5월]]부터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튀르크군에게는 이런 소문이 돌 정도로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 ||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들은 저 요새 안의 사람만이 아니다. 그 동안의 전쟁에서 죽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령이 되어서 저 요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ref>15년간 평생을 바쳐 싸워서 옷도 다 헤이해지고, 몰골 역시 유령 비슷하게 변할 정도였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ref> | |||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9년#9월|1669년 9월]], 이 성채의 수비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모로지니는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 베네치아가 이기더라도 베네치아가 입을 피해가 더 클 것'<ref>당시 전쟁에 쓰던 돈은 베네치아 전체 세입을 넘었었다.</ref>이라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 민간인 포함 22,000 명 정도되던 요새 내부의 인구는 3,6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참고로 이는 베네치아에서 야전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강화를 추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9년#9월|1669년 9월]], 이 성채의 수비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모로지니는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 베네치아가 이기더라도 베네치아가 입을 피해가 더 클 것'<ref>당시 전쟁에 쓰던 돈은 베네치아 전체 세입을 넘었었다.</ref>이라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 민간인 포함 22,000 명 정도되던 요새 내부의 인구는 3,6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참고로 이는 베네치아에서 야전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강화를 추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 ||
#수다, 스피날롱가, 그리고 그라보우사를 제외한 크레타 전역을 튀르크군에게 양도한다. 단 위의 3 요새는 연공금을 바칠 필요 없이 유지되는 베네치아의 고유한 권리이다. | #수다, 스피날롱가, 그리고 그라보우사를 제외한 크레타 전역을 튀르크군에게 양도한다. 단 위의 3 요새는 연공금을 바칠 필요 없이 유지되는 베네치아의 고유한 권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