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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itou Mountain Tianchi.jpg|thumb|백두산 천지]] | [[파일:Baitou Mountain Tianchi.jpg|thumb|백두산 천지]] | ||
'''백두산'''(白頭山)은 현무암질 [[마그마]]와 조면암질 [[마그마]]가 반복적으로 분출하여 생성된 휴화산<ref>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활화산/휴화산/사화산 구분법으로는 휴화산이지만,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활화산/사화산 구분법으로는 활화산으로 구분한다. 단지 휴지기에 들어섰을 뿐 분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ref>이다. | '''백두산'''(白頭山)은 현무암질 [[마그마]]와 조면암질 [[마그마]]가 반복적으로 분출하여 생성된 휴화산<ref>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활화산/휴화산/사화산 구분법으로는 휴화산이지만,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활화산/사화산 구분법으로는 활화산으로 구분한다. 단지 휴지기에 들어섰을 뿐 분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ref>이다. | ||
[[북한]]과 [[중국]]간 국경선 사이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2744 m이다. 백두산 관련 3국인 [[한국]], 북한, 중국 자료에서 백두산의 해발고도에 대해 서로 말이 달라서 남한은 2744m, 북한은 2750m, 중국은 2749.2m라고 하는데, 세 나라에서 사용하는 측량의 수준원점이 달라서 그렇다.<ref>수준원점은 각국에서 사용하는 평균 해수면의 기준점이다. 한국은 인천 앞바다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는 반면, 북한은 원산 앞바다의 해수면을, 중국은 톈진(天津) 앞바다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는데, 서로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ref> 산 정상에는 천지(天池)라는 거대한 칼데라호(湖)가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 [[북한]]과 [[중국]]간 국경선 사이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2744 m이다. 백두산 관련 3국인 [[한국]], 북한, 중국 자료에서 백두산의 해발고도에 대해 서로 말이 달라서 남한은 2744m, 북한은 2750m, 중국은 2749.2m라고 하는데, 세 나라에서 사용하는 측량의 수준원점이 달라서 그렇다.<ref>수준원점은 각국에서 사용하는 평균 해수면의 기준점이다. 한국은 인천 앞바다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는 반면, 북한은 원산 앞바다의 해수면을, 중국은 톈진(天津) 앞바다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는데, 서로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ref> 산 정상에는 천지(天池)라는 거대한 칼데라호(湖)가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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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토 문제 == | == 영토 문제 == | ||
법적 행정구역은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량강도 | 법적 행정구역은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량강도 삼지연군),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지린 성에 속한다. | ||
[[파일:영토.jpeg]] | [[파일:영토.jpeg]] | ||
백두산도 미래에 영토분쟁이 될 만한 소지가 있다. 북한과 중국은 [[1964년]] 조중변계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을 결정하였으나, 아직도 문제의 여지는 있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무시되긴 하지만, [[중화민국]](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행한 모든 것을 부정하므로 백두산에 대해서도 그 전체가 영토라고 주장하긴 한다. | 백두산도 미래에 영토분쟁이 될 만한 소지가 있다. 북한과 중국은 [[1964년]] 조중변계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을 결정하였으나, 아직도 문제의 여지는 있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무시되긴 하지만, [[중화민국]](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행한 모든 것을 부정하므로 백두산에 대해서도 그 전체가 영토라고 주장하긴 한다. | ||
== 천지 == | == 천지 == | ||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칼데라호이다. 최대수심 374 m, 면적은 9.82 km²로 수량은 약 20억 톤이다. 비교대상으로 남한에 있는 소양호를 예로 들면, 소양호는 면적은 46.5 km²에 수량은 29억 톤이다. 천지가 크기에 비해서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물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칼데라호이다. 최대수심 374 m, 면적은 9.82 km²로 수량은 약 20억 톤이다. 비교대상으로 남한에 있는 소양호를 예로 들면, 소양호는 면적은 46.5 km²에 수량은 29억 톤이다. 천지가 크기에 비해서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물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
백두산은 선사시대부터 자주 분화했기 때문에 분화구는 그 시절부터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천지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아마도 기원전 2천 년경 무렵, 그리고 937-8년에 있었던 대분화로 인해 생겼다고 추정한다. 백두산에서 10세기에 매우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분화도 많았는데, 937년에 발생한 분화는 매우 폭발적인 것이었으며, 화산폭발지수(VEI)를 가늠한다면 7.4 이상이었으리라고 본다. 이는 적어도 지난 2천 년간 중에서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화산폭발에 속하며, 이때 날아간 화산재가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대폭발로 인해 적어도 백두산 봉우리 1000 m 정도가 날아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대폭발로 인해 [[일본]]에도 B-TM이라고 부르는 방대한 화산재층이 생겼다. 그 외에도 [[1702년]]에 있던 분화도 지금의 천지를 형성하는 데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 백두산은 선사시대부터 자주 분화했기 때문에 분화구는 그 시절부터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천지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아마도 기원전 2천 년경 무렵, 그리고 937-8년에 있었던 대분화로 인해 생겼다고 추정한다. 백두산에서 10세기에 매우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분화도 많았는데, 937년에 발생한 분화는 매우 폭발적인 것이었으며, 화산폭발지수(VEI)를 가늠한다면 7.4 이상이었으리라고 본다. 이는 적어도 지난 2천 년간 중에서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화산폭발에 속하며, 이때 날아간 화산재가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대폭발로 인해 적어도 백두산 봉우리 1000 m 정도가 날아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대폭발로 인해 [[일본]]에도 B-TM이라고 부르는 방대한 화산재층이 생겼다. 그 외에도 [[1702년]]에 있던 분화도 지금의 천지를 형성하는 데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 ||
천지란 이름은 꽤 후대에 들어와서 생긴 듯 보인다. 18세기에 조선에서 서명응(徐命應)이 천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고지도에서는 천지라고 명기한 것이 없다. 고지도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이름은 '큰 호수'란 뜻의 대지(大池), 대택(大澤)이다. 심지어 그냥 단순하게 지(池)라고만 쓴 사례도 있다. 그 외에 고지도에서 보이는 다른 명칭으로는 달문담(達門潭), 하늘과 가깝다는 뜻인 천상근(天上近)이 있다. 역시 고지도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구한말에 천지를 가리켜 용왕담(龍王潭)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천지란 이름은 꽤 후대에 들어와서 생긴 듯 보인다. 18세기에 조선에서 서명응(徐命應)이 천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고지도에서는 천지라고 명기한 것이 없다. 고지도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이름은 '큰 호수'란 뜻의 대지(大池), 대택(大澤)이다. 심지어 그냥 단순하게 지(池)라고만 쓴 사례도 있다. 그 외에 고지도에서 보이는 다른 명칭으로는 달문담(達門潭), 하늘과 가깝다는 뜻인 천상근(天上近)이 있다. 역시 고지도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구한말에 천지를 가리켜 용왕담(龍王潭)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
=== 천지 괴물 === | === 천지 괴물 === | ||
천지에 괴물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 백두산에 특이한 생물이 산다는 이야기는 그 유래가 깊다. 중국의 문헌 《[[산해경]]》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 천지에 괴물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 백두산에 특이한 생물이 산다는 이야기는 그 유래가 깊다. 중국의 문헌 《[[산해경]]》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 ||
[[파일:금충.jpeg|thumb| | [[파일:금충.jpeg|thumb|300픽셀|백두산에 산다는 금충의 그림]] | ||
{{인용문2|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有蜚蛭,四翼。有蟲,獸首蛇身,名曰琴蟲。<br | {{인용문2|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有蜚蛭,四翼。有蟲,獸首蛇身,名曰琴蟲。<br> | ||
대황(大荒)의 한가운데에 불함(不咸)이라는 산이 있고 숙신씨국(肅愼氏國)이 있다. 이곳에 비질(蜚蛭)이 있는데 날개가 넷이다. 짐승의 머리에 뱀의 몸통을 한 것이 있는데 금충(琴蟲)이라 한다.|《산해경》, 장수철 옮김, [[2005년]], 현암 출판사<ref>번역문에서 '짐승의 머리에 뱀의 머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원문과 비교하면 오류가 분명하므로 '뱀의 몸통'이라고 바꾸었다.</ref>}} | 대황(大荒)의 한가운데에 불함(不咸)이라는 산이 있고 숙신씨국(肅愼氏國)이 있다. 이곳에 비질(蜚蛭)이 있는데 날개가 넷이다. 짐승의 머리에 뱀의 몸통을 한 것이 있는데 금충(琴蟲)이라 한다.|《산해경》, 장수철 옮김, [[2005년]], 현암 출판사<ref>번역문에서 '짐승의 머리에 뱀의 머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원문과 비교하면 오류가 분명하므로 '뱀의 몸통'이라고 바꾸었다.</ref>}} | ||
하지만 [[동진]](東晉) 때 사람인 [[곽박]](郭璞)이 《산해경》에 주를 달면서 금충에 대해서 [[뱀]]의 한 종류라고 설명하였으니, 금충은 거대한 괴수가 아니라 특이하게 생긴 뱀이었을 것이다. | 하지만 [[동진]](東晉) 때 사람인 [[곽박]](郭璞)이 《산해경》에 주를 달면서 금충에 대해서 [[뱀]]의 한 종류라고 설명하였으니, 금충은 거대한 괴수가 아니라 특이하게 생긴 뱀이었을 것이다. | ||
백두산 천지에는 소문에 나오는 거대한 괴수는 살 수가 없다. 선사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여러 번 분화했으며 개중에는 대폭발도 있었으니, 설령 그런 괴수가 있다고 해도 이미 옛날에 죽었을 것이다. 북한에서 천지에 산천어를 풀었는데, 천지가 차갑고 물이 깨끗해서 물고기가 (먹이가 없어서)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매우 잘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천지 괴물이 산천어를 잘못 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ref> [http://www.nocutnews.co.kr/news/374090 "백두산 천지 정체불명 생물체는 산천어일 것"], [[노컷뉴스]], | 백두산 천지에는 소문에 나오는 거대한 괴수는 살 수가 없다. 선사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여러 번 분화했으며 개중에는 대폭발도 있었으니, 설령 그런 괴수가 있다고 해도 이미 옛날에 죽었을 것이다. 북한에서 천지에 산천어를 풀었는데, 천지가 차갑고 물이 깨끗해서 물고기가 (먹이가 없어서)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매우 잘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천지 괴물이 산천어를 잘못 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ref> [http://www.nocutnews.co.kr/news/374090 "백두산 천지 정체불명 생물체는 산천어일 것"], [[노컷뉴스]], {{날짜/출력|2007-11-14}} 기사</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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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 == 명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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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이란 호칭은 [[고려]]시대 문헌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고려사]]》 성종 10년(991년) [[10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 백두산이란 호칭은 [[고려]]시대 문헌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고려사]]》 성종 10년(991년) [[10월]]조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 ||
{{인용문2|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br | {{인용문2|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br>[[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곳에 거주하게 했다.|《국역 고려사》, [[2008년]], 경인문화사(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온라인 제공)}} | ||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도 백두산이란 이름이 언급되므로, 백두산이란 호칭이 [[통일신라]]시대나, 혹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개연성이 있다. 한국역사학회 송용덕의 논문에서는 [[고구려]] 건국신화 등에서 나타나는 [[태백산]](太白山) 역시 백두산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으나, 북쪽 지방의 진산(鎭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일 가능성도 있다고 서술하였다. |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도 백두산이란 이름이 언급되므로, 백두산이란 호칭이 [[통일신라]]시대나, 혹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개연성이 있다. 한국역사학회 송용덕의 논문에서는 [[고구려]] 건국신화 등에서 나타나는 [[태백산]](太白山) 역시 백두산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으나, 북쪽 지방의 진산(鎭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일 가능성도 있다고 서술하였다. | ||
43번째 줄: | 43번째 줄: | ||
== 역사 속 백두산 == | == 역사 속 백두산 == | ||
백두산은 인근 여러 민족들이 영산으로 숭배하곤 하였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에서도 산악숭배신앙과 결부지어 백두산을 영산으로 받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며 중국 [[금나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려의 영토는 아닐지언정 고려의 천하에는 들어온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백두산이 한반도 모든 산들의 시작, 기원이라고 보았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금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흥왕지지(興王之地), 즉 왕조가 일어난 땅으로 생각하며 매우 중시했다. 금 세종 때는 [[1172년]]에 장백산의 산신을 | 백두산은 인근 여러 민족들이 영산으로 숭배하곤 하였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에서도 산악숭배신앙과 결부지어 백두산을 영산으로 받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며 중국 [[금나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려의 영토는 아닐지언정 고려의 천하에는 들어온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백두산이 한반도 모든 산들의 시작, 기원이라고 보았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금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흥왕지지(興王之地), 즉 왕조가 일어난 땅으로 생각하며 매우 중시했다. 금 세종 때는 [[1172년]]에 장백산의 산신을 흥극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봉했고, 금 [[장종]](章宗) 시절인 [[1193년]]에는 장백산신을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봉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 ||
[[고려]]에서는 묘청이 서경(지금의 평양)에 이궁을 세우면서, 궁월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건립했다. 그런데 팔성당에 모신 신격 중 첫 번째가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 주목할 만하다. 특히 백두산이 [[문수보살]]과 연결되어 있는데, [[불교]]의 《[[화엄경]]》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국토의 동북방에 청량산(淸凉山)이 있어 여기서 문수보살이 일만 보살 대중을 거느리며 법을 설한다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에서 동북방에 있는 백두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여 백두산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으며, 고려에서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후일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서도 청황실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고, 백두산을 민족의 기원지로 본 것도 참고할 만한 일이다.<ref> 국토의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구절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대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며 문수보살의 성지가 되는 경전적 근거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에서도 오대산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ref> | [[고려]]에서는 묘청이 서경(지금의 평양)에 이궁을 세우면서, 궁월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건립했다. 그런데 팔성당에 모신 신격 중 첫 번째가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 주목할 만하다. 특히 백두산이 [[문수보살]]과 연결되어 있는데, [[불교]]의 《[[화엄경]]》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국토의 동북방에 청량산(淸凉山)이 있어 여기서 문수보살이 일만 보살 대중을 거느리며 법을 설한다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에서 동북방에 있는 백두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여 백두산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으며, 고려에서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후일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서도 청황실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고, 백두산을 민족의 기원지로 본 것도 참고할 만한 일이다.<ref> 국토의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구절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대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며 문수보살의 성지가 되는 경전적 근거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에서도 오대산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ref> | ||
[[조선 (국가)|조선]]에서도 [[태종]] 때에는 고려 시절 영향 때문에 백두산에 소사(小社)로 제사를 올렸다. 하지만 세종 19년([[1437년]])에 사전을 정비하면서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로 하면서, 백두산이 고려의 영토는 아니어도 고려의 천하에는 든다고 했지만, 조선은 좀 더 엄격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의 천하'''를 이야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영토가 아닌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릴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 시절에도 양성지는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제사를 올리자고 주장하였으나 이 의견은 소수에 불과했다. 특히나 고대에는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백두산 근처를 영토로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 |||
[[조선]]에서도 [[태종]] 때에는 고려 시절 영향 때문에 백두산에 소사(小社)로 제사를 올렸다. 하지만 세종 19년([[1437년]])에 사전을 정비하면서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로 하면서, 백두산이 고려의 영토는 아니어도 고려의 천하에는 든다고 했지만, 조선은 좀 더 엄격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의 천하'''를 이야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영토가 아닌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릴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 시절에도 양성지는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제사를 올리자고 주장하였으나 이 의견은 소수에 불과했다. 특히나 고대에는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백두산 근처를 영토로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 |||
하지만 그런데도 조선에서도 백두산을 특별하게 인식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하지만 그런데도 조선에서도 백두산을 특별하게 인식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
[[파일:八道総図.jpg|thumb|right|500px|《신증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 | |||
원래 조선 중동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팔도총도는 전국에서 소사와 중사 제사를 드리는 지역을 그린 것인데, 백두산은 이때까지만 해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수록되었다. | |||
원래 조선 | |||
조선이 백두산에 다시 제사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부터다. 영조는 백두산이 조선의 왕조 건국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해서 [[1767년]](영조 43년)부터 제사를 올리기로 하되, 망제(望祭), 즉 백두산에서 제사를 올리지 않고 멀리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들 올리기로 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때 백두산을 정식으로 [[오악|북악]](北岳)으로 정하여 제사를 드렸으나, 한일병합으로 말미암아 금방 사라졌다. | 조선이 백두산에 다시 제사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부터다. 영조는 백두산이 조선의 왕조 건국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해서 [[1767년]](영조 43년)부터 제사를 올리기로 하되, 망제(望祭), 즉 백두산에서 제사를 올리지 않고 멀리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들 올리기로 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때 백두산을 정식으로 [[오악|북악]](北岳)으로 정하여 제사를 드렸으나, 한일병합으로 말미암아 금방 사라졌다. | ||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백두산은 (무장을 포함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갈 수 없고, 설령 간다고 해도 중간에 되돌아올 가능성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하고 험한 곳이었으므로, 영조 때에 백두산에 망제를 지내기로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백두산은 (무장을 포함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갈 수 없고, 설령 간다고 해도 중간에 되돌아올 가능성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하고 험한 곳이었으므로, 영조 때에 백두산에 망제를 지내기로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
영조 때에 백두산을 제사대상으로 올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숙종]] 때 [[청나라]]와 국경 문제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청나라도 정식으로 '백두산의 일부는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백두산에 제사를 올린다고 청나라가 뭐라고 할 거리가 없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 영조 때에 백두산을 제사대상으로 올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숙종]] 때 [[청나라]]와 국경 문제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청나라도 정식으로 '백두산의 일부는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백두산에 제사를 올린다고 청나라가 뭐라고 할 거리가 없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 ||
== [[화산]] 백두산 == | == [[화산]] 백두산 == | ||
2840만 년 전에 현무암질 마그마가 분화했으며, 1500만 년 전에 현무암질 마그마가 대량으로 분출하여 넓은 용암대지를 형성하였다. 이후 그 뒤에도 분화를 계속하여 작은 화산을 이루었는데, 60만 년~1만 년 전까지 조면암/유문암질 화산활동이 교대로 발생하여 지금의 백두산을 이루었다. 그 뒤로도 기원전 2천 년에도 분화가 있었고, (위 천지 항목에서도 언급했던) 서기 10세기의 대분화로 인해 지금의 천지가 형성되었다. | 2840만 년 전에 현무암질 마그마가 분화했으며, 1500만 년 전에 현무암질 마그마가 대량으로 분출하여 넓은 용암대지를 형성하였다. 이후 그 뒤에도 분화를 계속하여 작은 화산을 이루었는데, 60만 년~1만 년 전까지 조면암/유문암질 화산활동이 교대로 발생하여 지금의 백두산을 이루었다. 그 뒤로도 기원전 2천 년에도 분화가 있었고, (위 천지 항목에서도 언급했던) 서기 10세기의 대분화로 인해 지금의 천지가 형성되었다. | ||
그 뒤로도 1014~19년, 1199~[[1201년]], [[1702년]], [[1903년]]에도 분화한 기록이 있다. 가장 최근의 분화기록은 [[1925년]]에 분화했다는 것이다. 여기 언급한 연도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백두산 분화기록이 전해진다. [[1702년]](조선 숙종 28년)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음력 [[5월 14일]]에 함경도 부령부에서 오시 무렵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비릿한 냄새가 나며, 큰 화로에 앉은 듯 너무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런 열기가 다음날 축시까지 지속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들판에 하얀 재가 한 치나 싸여 있었다고 하였다. | 그 뒤로도 1014~19년, 1199~[[1201년]], [[1702년]], [[1903년]]에도 분화한 기록이 있다. 가장 최근의 분화기록은 [[1925년]]에 분화했다는 것이다. 여기 언급한 연도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백두산 분화기록이 전해진다. [[1702년]](조선 숙종 28년)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음력 [[5월 14일]]에 함경도 부령부에서 오시 무렵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비릿한 냄새가 나며, 큰 화로에 앉은 듯 너무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런 열기가 다음날 축시까지 지속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들판에 하얀 재가 한 치나 싸여 있었다고 하였다. | ||
== 대중문화 속의 백두산 == | == 대중문화 속의 백두산 == | ||
* 웹툰 《[[호랑이형님]]》의 등장인물 아린의 별명은 금나라 세종이 장백산신에게 내린 왕호인 | * 웹툰 《[[호랑이형님]]》의 등장인물 아린의 별명은 금나라 세종이 장백산신에게 내린 왕호인 '영응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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