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익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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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실이 임정 내부에 알려지면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아무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라고 해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군대인 광복군을 중국군의 지휘 아래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임정은 박찬익, [[조소앙]], [[김규식 (1881년)|김규식]], [[유동열]], [[조성환 (1875년)|조성환]] 등으로 분조회를 조직하게 하고, 9개 준승의 폐지 방안을 마련하게 했다. 그 결과 새로운 '한중호조군사협정' 방안을 마련하여 조소앙 김규식 등은 주로 중국정부를 상대로, 박찬익은 중국국민당 요인들을 상대로 교섭했다. 수십 차례의 교섭 끝에 1944년 9월 8일 9개 준승이 폐지되고, 한중호조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임정 내부에 알려지면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아무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라고 해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군대인 광복군을 중국군의 지휘 아래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1943년 1월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임정은 박찬익, [[조소앙]], [[김규식 (1881년)|김규식]], [[유동열]], [[조성환 (1875년)|조성환]] 등으로 분조회를 조직하게 하고, 9개 준승의 폐지 방안을 마련하게 했다. 그 결과 새로운 '한중호조군사협정' 방안을 마련하여 조소앙 김규식 등은 주로 중국정부를 상대로, 박찬익은 중국국민당 요인들을 상대로 교섭했다. 수십 차례의 교섭 끝에 1944년 9월 8일 9개 준승이 폐지되고, 한중호조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한편 1940년 10월 정기 의정원 회의에서는 전시체제로의 개편을 의결했다. 이때 4차 개헌으로 '주석 중심' 지도체제로 변경하면서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박찬익을 비롯하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송병조, 차이석 등 7인이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열린 국무위원회에서 각 국무위원의 부서를 결정하였는데, 박찬익은 법무부장 직을 맡았다. 외무부장 조소앙은 주로 중국 외교부와의 공식적인 관계 및 충칭 주재 외교사절과의 교섭을 담당했고, 김구가 국민당 요인들과의 교섭을 직접 담당할 때, 박찬익은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1943년경 재정조달을 수행하던 그는 또다시 공금횡령 혐의에 휘말렸다. 다행히 중국 측 재정책임자인 [[주쟈화]]가 해명해 준 덕분에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김구 암살 음모 사건' 등 갖가지 분규가 계속되었고, 김구를 선두로 박찬익, [[조완구]], [[이시영 (1869년)|이시영]], [[조성환 (1875년)|조성환]], [[황학수]], [[차이석]] 등 국무위원이 민족혁명당 인사들로부터 "완고파", "반통일파"로 지칭되며 한국독립운동진영의 통일과 단결에 반대된다는 공격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사직서를 제출했다가 민족혁명당의 수습으로 한달 만에 복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1940년 10월 정기 의정원 회의에서는 전시체제로의 개편을 의결했다. 이때 4차 개헌으로 '주석 중심' 지도체제로 변경하면서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박찬익을 비롯하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송병조, 차이석 등 7인이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열린 국무위원회에서 각 국무위원의 부서를 결정하였는데, 박찬익은 법무부장 직을 맡았다. 외무부장 조소앙은 주로 중국 외교부와의 공식적인 관계 및 충칭 주재 외교사절과의 교섭을 담당했고, 김구가 국민당 요인들과의 교섭을 직접 담당할 때, 박찬익은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1943년경 재정조달을 수행하던 그는 또다시 공금횡령 혐의에 휘말렸다. 다행히 중국 측 재정책임자인 [[주자화]]가 해명해 준 덕분에 오해를 풀수 있었다. 그러나 '김구 암살 음모 사건' 등 갖가지 분규가 계속되었고, 김구를 선두로 박찬익, [[조완구]], [[이시영 (1869년)|이시영]], [[조성환 (1875년)|조성환]], [[황학수]], [[차이석]] 등 국무위원이 민족혁명당 인사들로부터 "완고파", "반통일파"로 지칭되며 한국독립운동진영의 통일과 단결에 반대된다는 공격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사직서를 제출했다가 민족혁명당의 수습으로 한달 만에 복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족혁명당의 박찬익에 대한 공격은 마냥 무고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은 박찬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렇지만 민족혁명당의 박찬익에 대한 공격은 마냥 무고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은 박찬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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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김의한의 아들 김자동 씨 역시 오영섭 씨와의 면담에서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임시정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김의한의 아들 김자동 씨 역시 오영섭 씨와의 면담에서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인용문|박찬익은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부르며 매우 싫어하여,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을 혐오했다.}}
{{인용문|박찬익은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부르며 매우 싫어하여,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을 혐오했다.}]


박찬익의 전기에서는 독립운동진영의 통일에 힘써왔던 박찬익을 공격하는 민족혁명당의 행동이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지만, 이러한 증언들이 있는 것을 볼 때 박찬익 본인이 민족혁명당과의 타협을 저해한 부분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성향은 그 자신이 1940년 8월 25일 <한민> 잡지 제3, 4호에 기고한 <삼당통일흥중한문서>라는 제목의 중문 한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애국계몽운동시기부터 1940년 여름까지의 독립운동 상황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중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박찬익의 전기에서는 독립운동진영의 통일에 힘써왔던 박찬익을 공격하는 민족혁명당의 행동이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지만, 이러한 증언들이 있는 것을 볼 때 박찬익 본인이 민족혁명당과의 타협을 저해한 부분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성향은 그 자신이 1940년 8월 25일 <한민> 잡지 제3, 4호에 기고한 <삼당통일흥중한문서>라는 제목의 중문 한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애국계몽운동시기부터 1940년 여름까지의 독립운동 상황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중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인용문2|러시아의 한인공산당이 (중략) 마지막에는 주의, 주장이 다른 까닭으로, 어떤 때는 전일(戰一)로, 어떤 때는 조합으로, 소위 '민족주의계'의 혁명동지들은 오로지 전 민족적 대통일의 조기 완성을 위해 피동적 지위에서 그 ㅇ<ref>글자 파손</ref>을 맡고, 정신병자의 조리없는 행동에 ㅇ<ref>글자 파손</ref>을 발휘하여 분열되지 않고 참고 견딘 것이 10여년이었다.}}
{{인용문2|러시아의 한인공산당이 (중략) 마지막에는 주의, 주장이 다른 까닭으로, 어떤 때는 전일(戰一)로, 어떤 때는 조합으로, 소위 '민족주의계'의 혁명동지들은 오로지 전 민족적 대통일의 조기 완성을 위해 피동적 지위에서 그 역을 맡고, 정신병자의 조리없는 행동에 역을 발휘하여 분열되지 않고 참고 견딘 것이 10여년이었다.}}


'정신병자의 조리없는 행동'이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봉니다. 박찬익은 혁명역량을 모아 조국을 광복시키는 걸 달성하길 바랬으나, 사회주의자들이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자들은 10여년간 참아왔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박찬익은 사회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식민지 상태에 있는 국가에서는 민족모순이 계급모순을 우선한다는 것, 계급혁명이 민족혁명을 파괴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박찬익을 [[김구]], [[조완구]] 등과 함께 '민족파시스트'로 매도하고, '반통일파'로 지목하며 이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공격했다. 양측이 이처럼 극렬하게 대립했기에,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임정으로의 단결과 통일을 이뤄내지 못했다.
'정신병자의 조리없는 행동'이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봉니다. 박찬익은 혁명역량을 모아 조국을 광복시키는 걸 달성하길 바랬으나, 사회쥐의자들이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자들은 10여년간 참아왔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박찬익은 사회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식민지 상태에 있는 국가에서는 민족모순이 계급모순을 우선한다는 것, 계급혁명이 민족혁명을 파괴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박찬익을 [[김구]], [[조완구]] 등과 함께 '민족파시스트'로 매도하고, '반통일파'로 지목하며 이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공격했다. 양측이 이처럼 극렬하게 대립했기에,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임정으로의 단결과 통일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박찬익은 광복군 창설에 일익을 담당한 것 외에도 임정의 유지비와 공작금으로서 총 9억원을 중국정부로부터 지원받았으며, 한국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게 나눠줄 배급미인 평가미(平價米)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1944년 4월, 임정은 헌법을 개정하여 김구 중심의 주석, 부조석 체제를 갖추고 좌우가 합작하여 5당 통일에 성공했다. 이때 박찬익은 법무부장 직을 사퇴하고, 무임소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전시내각의 중책을 수행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헀다.
그렇지만 박찬익은 광복군 창설에 일익을 담당한 것 외에도 임정의 유지비와 공작금으로서 총 9억원을 중국정부로부터 지원받았으며, 한국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게 나눠줄 배급미인 평가미(平價米)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1944년 4월, 임정은 헌법을 개정하여 김구 중심의 주석, 부조석 체제를 갖추고 좌우가 합작하여 5당 통일에 성공했다. 이때 박찬익은 법무부장 직을 사퇴하고, 무임소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전시내각의 중책을 수행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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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분류:파주시 출신]]
[[분류:파주시 출신]]
[[부류:1884년 출생]]
[[분류:1949년 사망]]
[[분류:대한독립선언서 연서자 39인]]
[[분류:대한독립선언서 연서자 39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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