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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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호는 중수(中樹)이다. 본관은 고령 박씨이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호는 중수(中樹)이다. 본관은 고령 박씨이다.


== 생애 ==
== 생애 ==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신징, 현 중국 장춘 소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학사편입을 통해 입교, 57기로 졸업하였다. 졸업후 만주국 육군 제8단에 임관과 함께 배치되어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친일파로 규정했지만,<ref>이걸 가지고 박정희 반대세력은 "박정희는 친일파다." "독립운동가를 죽였다." 고 하고, 지지세력은 "국가에서는 박정희는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았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사설조직이라서 뭔가 문제있는 조직이다."라고 말한다. 이 만주국 장교 근무 문제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http://www.minjok.or.kr/images/2012/pdf/dic_park.pdf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항목 전문(PDF내려받기) - 민족문제연구소]</ref>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파]] 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이 일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언급되게 된다.  광복 후인 [[1946년#7월|1946년 7월]]에 광복군 소속으로 귀국하하여 늦은 나이에 [[육군사관학교]](당시명칭은 조선경비 사관학교)에 입교한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좌익운동에 투신하던 형님 [[박상희]] 씨가 대구사건<ref>대구 폭동이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일단 이 사건은 국가에서는 [[10월]]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고 "항쟁"이냐 "폭동"이냐 하는 역사평가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http://www.jinsil.go.kr/appdealing/databoard/app_read.asp?num=372&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대구 10월사건 진실화해보고서]</ref>에 휘말려 사망하자, 남로당 측의 제의로 남조선로동당에 입당,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자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이 구형되었으나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 [[백선엽]](당시 계급 대령)<ref> 이 사람은 명백한 친일파로, 실제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해서 독립운동가 토벌에 나선적이 있었다! 심지어 창시개명도 시라카와 요시미치라는 당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에 죽은 일본군 장교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ref>에게 한번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백선엽이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고 이후 만주군계 선후배 인맥들이 가세하여 남로당에 가입은 하였으되 활동을 한 것이 별로 없고, 수사에 협조적이었단 이유를 들어 감상적 공산주의자에 불과하니 석방하자는 의견을 군내 좌익숙군 책임자인 특무대 장교 [[김창룡]](당시 헌병 대위)이 제출했고 죽이기에 아까운 인물이란 판단을 받아들여 국방부, 미국의 승인을 거쳐 [[이승만]]의 서명을 얻어 불명예제대로 그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모두 바쳤다. 흔히 이것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라 언급되지만 실제론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신징, 현 중국 장춘 소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학사편입을 통해 입교, 57기로 졸업하였다. 졸업후 만주국 육군 제8단에 임관과 함께 배치되어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친일파로 규정했지만,<ref>이걸 가지고 박정희 반대세력은 "박정희는 친일파다." "독립운동가를 죽였다." 고 하고, 지지세력은 "국가에서는 박정희는 친일파로 규정하지 않았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사설조직이라서 뭔가 문제있는 조직이다."라고 말한다. 이 만주국 장교 근무 문제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http://www.minjok.or.kr/images/2012/pdf/dic_park.pdf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항목 전문(PDF내려받기) - 민족문제연구소] [[위키백과:대한민국_정부_발표_친일반민족행위자_명단_-_통치_기구#.EA.B5.B0.EC.9D.B8_.2834.EB.AA.85.29|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 </ref>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파]] 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이 일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언급되게 된다.  광복 후인 [[1946년#7월|1946년 7월]]에 광복군 소속으로 귀국하하여 늦은 나이에 [[육군사관학교]](당시명칭은 조선경비 사관학교)에 입교한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좌익운동에 투신하던 형님 [[박상희]] 씨가 대구사건<ref>대구 폭동이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일단 이 사건은 국가에서는 [[10월]]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고 "항쟁"이냐 "폭동"이냐 하는 역사평가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http://www.jinsil.go.kr/appdealing/databoard/app_read.asp?num=372&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대구 10월사건 진실화해보고서]</ref>에 휘말려 사망하자, 남로당 측의 제의로 남조선로동당에 입당,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자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이 구형되었으나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 [[백선엽]](당시 계급 대령)<ref> 이 사람은 명백한 친일파로, 실제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해서 독립운동가 토벌에 나선적이 있었다! 심지어 창시개명도 시라카와 요시미치라는 당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에 죽은 일본군 장교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ref>에게 한번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백선엽이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고 이후 만주군계 선후배 인맥들이 가세하여 남로당에 가입은 하였으되 활동을 한 것이 별로 없고, 수사에 협조적이었단 이유를 들어 감상적 공산주의자에 불과하니 석방하자는 의견을 군내 좌익숙군 책임자인 특무대 장교 [[김창룡]](당시 헌병 대위)이 제출했고 죽이기에 아까운 인물이란 판단을 받아들여 국방부, 미국의 승인을 거쳐 [[이승만]]의 서명을 얻어 불명예제대로 그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모두 바쳤다. 흔히 이것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라 언급되지만 실제론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강제 예편되었으며 월급이 압류되었고 이때문에 동거중이던 여성마저 떠나버리는등 고난의 연속이었다.(참고로 이때당시 첫번째 부인 김호남 씨와 이혼상태) 하지만 백선엽 대령이 이때 그의 생활을 돌봐주었다. 백선엽 장군 은 그 답례로서 3공화국때 우방국 대사등을 역임하는 등의 보은을 받기도 하였다. 백선엽의 주선으로 군문관(오늘날의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훗날 군사정변의 동지이자 친인척이 되는 [[김종필]] 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금 박정희 에게도 기회가 찾아오는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는 곧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귀하였다. 이후 [[1953년#11월|1953년 11월]] 준장이 되었고, [[1954년]]에는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3월|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으며, [[1959년]]에는 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에 군수기지 사령관,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제2군 부사령관에 이른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강제 예편되었으며 월급이 압류되었고 이때문에 동거중이던 여성마저 떠나버리는등 고난의 연속이었다.(참고로 이때당시 첫번째 부인 김호남 씨와 이혼상태) 하지만 백선엽 대령이 이때 그의 생활을 돌봐주었다. 백선엽 장군 은 그 답례로서 3공화국때 우방국 대사등을 역임하는 등의 보은을 받기도 하였다. 백선엽의 주선으로 군문관(오늘날의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훗날 군사정변의 동지이자 친인척이 되는 [[김종필]] 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금 박정희 에게도 기회가 찾아오는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는 곧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귀하였다. 이후 [[1953년#11월|1953년 11월]] 준장이 되었고, [[1954년]]에는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3월|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으며, [[1959년]]에는 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에 군수기지 사령관,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제2군 부사령관에 이른다.


한국 전쟁 기간에도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혼란은 여전하였으며 이를 보고 자체적인 쿠데타를 획책했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서 그만두었다. 첨언하자면,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군부는 미국에 의해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장교단으로 구성되었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집단중 하나였다.{{ㅊ|OMG!}} 거기다가 미국의 벤 플리트 장군의 지지도 있기도 했고.
한국 전쟁 기간에도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혼란은 여전하였으며 이를 보고 자체적인 쿠데타를 획책했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서 그만두었다. 첨언하자면,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군부는 미국에 의해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장교단으로 구성되었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집단중 하나였다.{{ㅊ|OMG!}} 거기다가 미국의 벤 플리트 장군의 지지도 있기도 했고...


4.19 혁명 이후 [[허정]]의 임시내각이 집권, 이후 윤보선 대통령의 제 2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사회적 혼란은 계속되자 박정희는 접어두었던 쿠데타 계획을 다시 꺼내들어  육군사관학교 8기를 중심으로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이후 장도영 장군을을 포함한 이른바 알레스카 토벌작전(반혁명 사건)을 통해 군부내 반대파를 숙청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가 4성장군으로 최종 예편후 민정 이양약속을 실현시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과 접전을 벌이며 승리하여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3년#12월|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60~70년대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제는 이 시기 매년 2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현대 한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많다. 그는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추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탄합하였고, 물리적 정치적 테러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4.19 혁명 이후 [[허정]]의 임시내각이 집권, 이후 윤보선 대통령의 제 2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사회적 혼란은 계속되자 박정희는 접어두었던 쿠데타 계획을 다시 꺼내들어  육군사관학교 8기를 중심으로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이후 장도영 장군을을 포함한 이른바 알레스카 토벌작전(반혁명 사건)을 통해 군부내 반대파를 숙청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가 4성장군으로 최종 예편후 민정 이양약속을 실현시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과 접전을 벌이며 승리하여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3년#12월|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60~70년대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제는 이 시기 매년 2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현대 한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많다. 그는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추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탄합하였고, 물리적 정치적 테러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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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 평가 ==
=== 긍정적인 평가 ===
=== 긍정적인 평가 ===
물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윤보선이 만든 것은 맞지만<ref>윤보선은 경공업 위주였다.</ref>, 그것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킨건 박정희이다. 또한 국민건강의료보험 제도도 만들어 외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외 업적은 녹화사업을 펼쳐 민둥산이었던 한국의 산들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했다. 무엇보다도 경제 발전이 긍정적인 업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물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윤보선이 만든 것은 맞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킨건 박정희이다. 또한 국민건강의료보험 제도도 만들어 외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외 업적은 녹화사업을 펼쳐 민둥산이었던 한국의 산들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했다.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라는 박정희 최대의 실수가 있었지만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 어느 정도는 상쇄되었다. 군사독재는 잘못한건 맞지만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 잡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는 한편 군사독재 자체가 그 동안의 업적을 싹다 지워버렸다는 평가도 있다.
 
=== 부정적인 평가 ===
=== 부정적인 평가 ===
{{인용문|우리는 아직까지 박정희의 그늘 아래 있다.|김충식|<남산의 부장들> 92년판}}
{{인용문|우리는 아직까지 박정희의 그늘 아래 있다.|김충식|<남산의 부장들> 92년판}}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 광복 후에 남로당 가입, 5.16 군사정변으로 세운 정부의 정당성, 유신헌법 등 통치 행위의 정당성, 그리고 70년대의 경제 발전 등이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된다.<ref>참고로 박정희의 정책이 포퓰리즘적이라는 이야기가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http://m.hankookilbo.com/news/read/201612141954929472 임지현 학자는 그가 유신헌법이 서구식 민주주의에 물든 비판적 지식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국민투표를 쓴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는 경제 정책 또한 포풀리즘적이라고 했다.]</ref>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 광복 후에 남로당 가입, 5.16 군사정변으로 세운 정부의 정당성, 유신헌법 등 통치 행위의 정당성, 그리고 70년대의 경제 발전 등이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된다.<ref>참고로 박정희의 정책이 포퓰리즘적이라는 이야기가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http://m.hankookilbo.com/news/read/201612141954929472 임지현 학자는 그가 유신헌법이 서구식 민주주의에 물든 비판적 지식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국민투표를 쓴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는 경제 정책 또한 포풀리즘적이라고 했다.]</ref>


흔히 '''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주요 업적을 꼽지만 그게 오롯이 박정희의 힘으로 일군 것도 아니고<ref>비록 현재 태극기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령대지만 그 어르신들의 노고도 기억해야 한다. 박정희 1인의 힘으로 일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ref><ref>박노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6819.html 박정희 시대, ‘기적’은 없었다], 한겨레, 2015.04.14.</ref><ref>사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존 F. 케네디|JFK]]의 경제 원조 정책 덕택이라는 이아기가 있다.</ref> 사실상 그 업적을 10월 유신으로 다 말아먹었다. 그는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으며 여성 편력이 복잡하다는 점도 논란 거리다. 또한 군사를 이용해서 정권을 찬탈 했다는 점은 6.25 전쟁 당시 북괴군이 남하하여 대한민국을 빼앗으려 했다는 점과 동급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이 다를까?
흔히 '''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주요 업적을 꼽지만 그게 오롯이 박정희의 힘으로 일군 것도 아니고<ref>박노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6819.html 박정희 시대, ‘기적’은 없었다], 한겨레, 2015.04.14.</ref><ref>사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존 F. 케네디|JFK]]의 경제 원조 정책 덕택이라는 이아기가 있다.</ref> 사실상 그 업적을 10월 유신으로 다 말아먹었다. 그는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으며 여성 편력이 복잡하다는 점도 논란 거리다. 또한 군사를 이용해서 정권을 찬탈 했다는 점은 6.25 전쟁 당시 북괴군이 남하하여 대한민국을 빼앗으려 했다는 점과 동급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이 다를까?


박정희 정권 당시는 젊은 층들이 누리는 문화를 정서를 해친다는 명목을 내세워 검열 했다. 정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는 건 핑계고 사실상 젊은 층들을 우민화 시키기 위한 통제의 수단으로 문화를 탄압한 것이다. 당시, 미니스커트 단속, 장발 단속, 외국노래 방송 금지, 만화책 검열 등이 이뤄졌다. 중국의 죽의 장막과 같은 일이 민주국가 라고 하던 당시 대한민국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는 젊은 층들이 누리는 문화를 정서를 해친다는 명목을 내세워 검열 했다. 정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는 건 핑계고 사실상 젊은 층들을 우민화 시키기 위한 통재의 수단으로 문화를 탄압한 것이다. 당시, 미니스커트 단속, 장발단속, 외국노래 방송 금지, 만화책 검열 등이 이뤄졌다. 중국의 죽의 장막과 같은일이 민주국가 라고 하던 당시 대한민국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는 일본 제국 육군에서 근무하여 한국군에 일본군식 똥군기 및 악습이 유입되기도 했다.


지역감정 조장, 일본 식민 배상금의 배분, 소득 불평등 심화, 도시로의 인구 쏠림, [[박근혜]] 빨리빨리 문화, 군필자 우대, 경찰 공무원의 인권 침해 등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는 박정희 시절에 시작했다고 봐도 된다.
지역감정 조장, 일본 식민 배상금의 배분, 소득 불평등 심화, 도시로의 인구 쏠림, [[박근혜]] 빨리빨리 문화, 군필자 우대, 경찰 공무원의 인권 침해 등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는 박정희 시절에 시작했다고 봐도 된다.
집권 말기에는 부마항쟁 등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터져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너무 온건하게 나간다고 [[김재규]]를 비난했으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전차로 밀어버려야 된다고 주장한 차지철의 주장에 동조하며 김재규를 더욱 더 압박했다. 차치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도 100~200만 명 죽인다고 별 일 있겠냐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릴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발언하여 이를 독려하였다. 실제로 실행하기 전에 김재규가 두 사람을 사살하였기에 대규모 학살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박정희가 국민을 어떻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ㅊ|박정희는 자신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한 김재규한테 감사해야 한다. 실행했다면 전두환과 동급의 취급을 받는다.}}
대한민국 '''역대 최장기''' 집권을 한 대통령이다.
국가주도의 자본주의인 국가자본주의를 추구했다.


=== 비교되는 인물 ===
=== 비교되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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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사고 ==
== 사건사고 ==
* [[5·16 군사정변]]
* [[5.16 군사정변]]
* [[경부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 [[YH무역 사건]]
* [[YH무역사건]]
* [[부마민주항쟁]]
* [[부마항쟁]]
*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
* [[전태일 분신자살]]
* [[석유 파동]]
* [[오일쇼크]]
* [[10·26 사건]]
* [[10.26 사태]]
* [[인민혁명당 사건]]
* [[인민혁명당 사건]]
* [[10월 유신]]
* [[10월 유신]]
* [[장준하]] 사망 음모론
* [[장준하]] 사망 음모론
*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 [[동아 일보 백지 광고 사태]]
*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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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
[[분류:대한민국의 군인]]
[[분류:대한민국의 군인]]
[[분류:독재자]]
[[분류:1917년 출생]]
[[분류:1979년 사망]]
[[분류:구미시 출신]]
[[분류:구미시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교사]]
[[분류:교사]]
[[분류:대한민국의 공산주의자]]
[[분류:공산주의자]]
[[분류:고령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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