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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17일 미 육군 운송함 토마스 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출발한 박용만은 마닐라를 거쳐 7월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8월 말 [[조성환 (1875년)|조성환]], 백준, 박상환, [[이승복 (1895년)|이승복]], 김병희 등과 만나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조성환을 추대하고 자신은 총참모로 취임했다. | 1919년 5월 17일 미 육군 운송함 토마스 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출발한 박용만은 마닐라를 거쳐 7월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8월 말 [[조성환 (1875년)|조성환]], 백준, 박상환, [[이승복 (1895년)|이승복]], 김병희 등과 만나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조성환을 추대하고 자신은 총참모로 취임했다. | ||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 |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동휘]] 등과 함께 하와이 대조선독립단을 비롯하여 국내 및 해외 각지에 국민군을 확대, 조직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에 임시정부 측은 상하이에 와서 외무총장으로 활동하지 않는 박용만을 비판했고, 박용만은 1920년 4월 3일 상하이로 와서 만찬회에 참석해 안창호에게 "나는 군사주의에 뜻이 있으므로 외교일은 보지 못하겠다."고 말한 뒤 4월 19일 국무원 회의에서 사임했다. | ||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민군을 창설하는 것이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자 베이징으로 거점을 옮겼다. 1920년 4월 중순 [[문창범]]을 만나 군사단체의 통일과 러시아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이후 [[김가진]]이 조직한대동단에 가담하여 무정부장으로 활동하다 상무부장 [[나창헌]]이 러시아로 가서 활동할 것을 권하자 5월에 [[신채호]], [[유동열]], 김영학 등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러시아로 향했다. |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민군을 창설하는 것이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자 베이징으로 거점을 옮겼다. 1920년 4월 중순 [[문창범]]을 만나 군사단체의 통일과 러시아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이후 [[김가진]]이 조직한대동단에 가담하여 무정부장으로 활동하다 상무부장 [[나창헌]]이 러시아로 가서 활동할 것을 권하자 5월에 [[신채호]], [[유동열]], 김영학 등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러시아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