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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르에 이어 남러시아 초원의 여러 루시 공국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동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1237년, [[바투]]는 블라디미르 왕공 유리 2세에게 몽골에 스스로 복속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보낸다. 유리 2세가 한 달 간 답신을 보내지 않자 몽골인들은 군사 행동에 돌입한다. 오카 강 유역의 도시 랴잔을 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랴잔은 파괴된다. 놀란 유리 2세는 군대를 파견해 몽골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크게 패배하고 만다. 이후 몽골군은 콜롬나와 모스크바를 차례로 점령하여 불태웠다. 결국 [[1238년]] [[2월 8일]]에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수도 블라디미르마저 점령되어 파괴된다. 왕공은 도주에 성공해 볼가강 이북에서 다시 군대를 일으켰으나, 1238년 3월 4일 다시 몽골군에게 격파당한다. 이로서 러시아 평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세력은 완전히 꺾였으며, 몽골군은 타 루시 공국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간다. 1240년, 키예프를 점령하면서 루시 정벌이 막을 내린다. | 불가르에 이어 남러시아 초원의 여러 루시 공국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동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1237년, [[바투]]는 블라디미르 왕공 유리 2세에게 몽골에 스스로 복속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보낸다. 유리 2세가 한 달 간 답신을 보내지 않자 몽골인들은 군사 행동에 돌입한다. 오카 강 유역의 도시 랴잔을 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랴잔은 파괴된다. 놀란 유리 2세는 군대를 파견해 몽골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크게 패배하고 만다. 이후 몽골군은 콜롬나와 모스크바를 차례로 점령하여 불태웠다. 결국 [[1238년]] [[2월 8일]]에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수도 블라디미르마저 점령되어 파괴된다. 왕공은 도주에 성공해 볼가강 이북에서 다시 군대를 일으켰으나, 1238년 3월 4일 다시 몽골군에게 격파당한다. 이로서 러시아 평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세력은 완전히 꺾였으며, 몽골군은 타 루시 공국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간다. 1240년, 키예프를 점령하면서 루시 정벌이 막을 내린다. | ||
그리고 몽골군은 동유럽으로 들이닥쳤다. 몽골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주력은 헝가리로 진군했으며, 일부는 폴란드로 향했다. 1241년 4월 9일, 차가타이가의 바이다르 등이 이끄는 폴란드 방면 몽골군은 현재의 | 그리고 몽골군은 동유럽으로 들이닥쳤다. 몽골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주력은 헝가리로 진군했으며, 일부는 폴란드로 향했다. 1241년 4월 9일, 차가타이가의 바이다르 등이 이끄는 폴란드 방면 몽골군은 현재의 왈슈타트에서 독일기사단과 폴란드군의 연합군을 격파했다.<ref>다만 이 전투가 실존했는지 여부를 놓고 약간의 논란이 있다. 동시대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전투이기 때문이다.</ref> 이어서 1241년 4월 11일, 바투가 직접 이끄는 몽골 주력군은 사요 강변에서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방어선이 무너진 헝가리는 몽골군에게 유린되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서유럽으로 향했다. 이들 동유럽 난민은 독일 등 서유럽 국가 주민들에게 몽골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서유럽은 몽골의 칼끝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 ||
그런데 몽골군은 서유럽에 들이닥치기 직전, 진군을 멈춘다. 1242년 3월, 우구데이 카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철군 명령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몽골군은 서유럽에 들이닥치기 직전, 진군을 멈춘다. 1242년 3월, 우구데이 카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철군 명령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 ||
==주치 울루스의 탄생과 구육의 즉위== | ==주치 울루스의 탄생과 구육의 즉위== |